제국의 침실까지 들어온 시베리아의 「성자」
1905년 11월 1일,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4시에 세르기옙카로 갔다. 밀리차 및 스타나와 차를 마셨다. 하느님의 사람 — 토볼스크 출신 그리고리와 알게 되었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 신비가. 황태자의 혈우병을 진정시켜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고, 전시에 장관 인사까지 좌우했다. 1916년 12월 군주제를 구하려던 귀족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왕조는 두 달 뒤 무너졌다.
경력 연표
- 1900s시베리아 순례자에서 페테르부르크 살롱으로
- 1905–07황실에 소개되어 황태자의 발작을 진정
- 1911–16인사 개입 스캔들, 전시의 「장관 도약」
- 1916.12유수포프 저택에서 살해
황태자의 침상 — 치유와 신임
라스푸틴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혈우병이었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타박상만으로도 내출혈이 멎지 않는 중증 혈우병을 앓고 있었고, 당대 의학은 속수무책이었다. 라스푸틴이 언제 처음 알렉세이를 치료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907년 봄 내출혈을 일으킨 황태자를 위해 알렉산드라 황후가 라스푸틴을 불러 기도하게 했고, 다음날 증세가 호전되면서 황후의 신뢰가 확고해졌다.
전환점은 1912년 가을 스파와(Spala) 사냥터에서 찾아왔다. 마차의 급격한 흔들림으로 허벅지와 사타구니에 큰 혈종이 생긴 알렉세이는 고열과 극심한 고통 속에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 궁정 의사들은 속수무책이었고, 황후는 시베리아에 있던 라스푸틴에게 전보를 쳤다. 라스푸틴은 곧바로 답신을 보냈다. "하느님이 당신의 눈물을 보셨고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어린이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들이 그를 너무 괴롭히지 않게 하십시오." 다음날 출혈이 멈췄고, 주치의 표도로프는 "의학적으로 전혀 설명할 수 없는 회복"이라고 고백했다.
이 한 사건으로 라스푸틴은 단순한 신비가에서 황실의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격상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 없이는 아들이 죽는다고 믿었고, 그 신념은 전시에 장관 인사까지 라스푸틴에게 의존하게 만든 심리적 토대가 되었다. 훗날 의사들은 라스푸틴이 당시 통증 완화제로 쓰이던 아스피린(혈액 응고를 방해한다는 사실이 1950년대에야 밝혀진 약물)의 투여를 막았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황후에게 그것은 기적이었고, 그 믿음이 제국의 마지막 10년을 관통하는 정치적 동력이 되었다.
전시의 그림자 정부 — 장관 도약과 제국의 자멸
1915년 9월, 니콜라이 2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겠다며 전선으로 떠나면서 러시아 제국의 국내 정치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황후의 모든 결정은 라스푸틴을 통과했다. 라스푸틴은 정식 직함이 전혀 없었음에도 전시 내각의 핵심 인사권을 쥐었고, 1915년부터 1916년 사이에 총리 3명, 내무장관 5명, 전쟁장관 4명, 외무장관 3명이 교체되는 이른바 「장관 도약」이 벌어졌다.
라스푸틴의 인사 원칙은 단순했다. 측근의 청탁과 뇌물, 그리고 무엇보다 황후에 대한 충성 여부였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문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라스푸틴은 대신들에게 다가가 껴안고 입을 맞추며 "자, 이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하자"라고 말하는 식으로 조언했고, 황후에게는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누구를 임명하라고 말했다고 전하는 식이었다. 두마 의원 블라디미르 푸리슈케비치는 1916년 11월 연설에서 "차르의 대신들은 라스푸틴과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라는 러시아의 사악한 천재의 손에 실이 쥐인 꼭두각시가 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전쟁이 교착되고 식량난이 심화될수록 모든 불만은 독일 태생 황후와 그녀의 '성자'에게 집중되었다.
라스푸틴 자신도 자신이 제국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죽기 직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냈다고 전해지는 편지에서 라스푸틴은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보야르와 귀족들에게 살해된다면, 그들의 손은 내 피로 물들어 25년 동안 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를 버릴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죽일 것이며, 25년 동안 이 나라에 귀족은 없을 것이다.… 차르의 가족 중 누구도 2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살해 두 달 뒤 왕조는 무너졌고, 1년 반 뒤 황실 가족은 처형되었다.
살해 — 유수포프 저택의 마지막 밤
1916년 12월 16일(구력) 밤,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은 아내 이리나를 소개하겠다며 라스푸틴을 모이카 강변의 유수포프 저택 지하실로 불러들였다. 이리나는 실제로 크림에 있었다. 유수포프는 훗날 청산가리 탄 마데이라 와인과 장밋빛 과자를 권했다고 회고했으나, 부검 결과 위장에는 음식물이 전혀 없었다. 유수포프가 근거리에서 권총을 발사했고 라스푸틴은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곧 의식을 회복해 지하실 문으로 도주했고, 총성을 들은 블라디미르 푸리슈케비치가 뒤쫓아 네 발을 쏘아 두 발이 적중했다. 시신은 크레스톱스키 섬의 말라야 넵카 강 얼음 아래로 던져졌다. 부검의 드미트리 코소로토프는 사인을 근거리 이마 총상으로 판정했다. 12월 21일 차르스코예 셀로에 매장되었으나, 2월혁명 후 발굴되어 1917년 3월 10~11일 밤 페트로그라드 공과대학 보일러에서 소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