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Сахаров
소련 러시아 1921–1989 → 유형 1980

수소폭탄을 만들고, 체제에 등을 돌린 물리학자

1986년 12월 16일, 고리키의 감시 아파트에 전화가 놓인 지 하루 만에 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는 고르바초프였다. "모스크바로 돌아오십시오." 사하로프는 감사 인사와 동시에 정치범 석방을 꺼냈다. 7년 가까운 유형을 끝낸 그 순간에도 그는 양심의 의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32세의 최연소 정회원 원사(院士) — 그리고 그 모든 특권을 내려놓은 반체제의 양심. 1968년 프라하 진압 즈음 체제와 공개적으로 갈라섰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다 1980년 고리키로 유형당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전화 한 통으로 돌아와, 인민대의원 자격으로 연단에서 싸우다 죽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53년 8월 12일, 세미팔라틴스크의 섬광

1953년 8월 12일 새벽,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 위로 소련 최초의 수소폭탄 RDS-6s가 섬광을 뿜었다. 핵분열 물질과 융합 연료를 겹겹이 쌓은 이른바 「슬로이카(층쌓기 케이크)」 설계의 핵심 착상을 내놓은 사람은 서른두 살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였다. 그는 1948년 이고리 탐의 그룹에 합류한 이래 열핵무기 이론에 몰두했고, 실험 성공 직후 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젊은 축에 드는 정회원으로 선출됐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핵 독점을 과시하던 시대에, 소련의 수소폭탄은 일방적 핵 위협의 시대를 끝내고 전략적 균형을 세운 사건이었다. 사하로프 자신도 당시에는 이 일을 평화를 지키는 노동으로 이해했고, 1955년의 2단계 열핵폭탄 RDS-37 실험까지 설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국가는 그에게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세 차례 수여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실험들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대기권 핵실험의 방사성 낙진이 문턱값 없이 세계 인구에 누적 피해를 준다는 계산을 발표했고, 1961년 초대형 폭탄 실험 재개를 둘러싸고 흐루쇼프와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대기권·수중·우주 핵실험을 금지한 1963년 모스크바 조약의 성립에는 실험 당사자였던 사하로프의 집요한 문제 제기가 한몫을 했다. 무기를 만든 손이 무기를 묶는 조약을 도운 셈이었다.

1968년의 「성찰」, 수소폭탄의 아버지가 반체제로 가는 길

사하로프의 전향은 하루아침의 회심이 아니라 20년에 걸친 점진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그는 대기권 핵실험의 방사능 낙진이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 갈 것이라 계산하고 실험 중단을 지도부에 촉구했다. 1961년 그는 흐루쇼프 앞에서 초대형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했다가 공개적으로 면박을 당했다.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의 성립에는 그의 집요한 설득이 한몫했다고 평가된다.

1968년 그는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성찰」을 썼다.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 두 체제는 수렴할 수밖에 없으며, 지적 자유 없이는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다는 논지였다. 지하 출판으로 퍼진 글이 뉴욕타임스에 전문 게재되자 당국은 그를 모든 기밀 연구에서 배제했다. 특권의 정점에 있던 과학자는 그렇게 인권운동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1970년 그는 인권위원회를 공동 창설했고, 정치범 재판마다 방청석에 나타나는 것으로 항의했다. 1975년 소련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출국이 금지되어 아내 옐레나 본네르가 대신 수상 연설을 읽었다. 「나라의 양심」이라는 별칭이 이 무렵 굳어졌다.

고리키 유형 7년, 그리고 1986년 12월의 전화 한 통

197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하자 사하로프는 외국 언론에 침공을 공개 비판했다. 이듬해 1월 그는 재판 없는 행정 조치로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도시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로 추방되었다. 7년의 유형 동안 그는 계단참의 감시원, 도청, 원고 탈취 속에서 지냈고, 아내 본네르의 치료와 출국을 요구하며 세 차례 단식투쟁을 벌여 강제 급식까지 당했다. 그 사이 서방에서는 그의 석방이 미소 관계의 시금석이 되었다.

1986년 12월 어느 날, 감시원들이 그의 아파트에 전화기를 설치했다. 다음 날 걸려 온 전화의 목소리는 고르바초프였다. 모스크바로 돌아와 「애국적 활동」을 재개하라는 통보였다. 이 전화 한 통은 글라스노스트가 선전이 아님을 국내외에 알린 가장 극적인 신호였다.

돌아온 사하로프는 사면이 아니라 신념의 승인으로 복귀를 받아들였고, 남은 3년을 정치범 전원 석방과 개혁의 급진화를 요구하는 데 썼다. 한때 그를 가둔 권력과 협력하면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만년의 사하로프가 택한 자리였다.

1989년 6월, 인민대의원대회의 연단에서

1968년 사하로프는 논문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성찰」을 지하출판으로 내놓았고, 그 글은 그해 7월 뉴욕타임스에 전문이 실렸다. 핵전쟁의 공멸 위험 앞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며 수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즉시 무기 연구에서 배제됐고, 1970년 인권위원회를 공동 창설하며 반체제 인사의 길로 들어섰다. 197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출국이 허용되지 않아 아내 옐레나 본네르가 대신 수상했고, 1980년 1월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공개 비판한 직후 재판 없이 고리키시로 유형됐다. 7년의 유형은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가 직접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귀환을 청하면서 끝났다.

1989년 봄 그는 과학아카데미 몫의 인민대의원으로 선출됐고, 제1차 인민대의원대회의 연단에 거듭 올랐다. 당의 지도적 역할을 규정한 헌법 6조의 폐지와 「권력에 관한 법령」을 요구하던 그는 야유와 박수를 동시에 받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발언 때는 회의장의 성난 함성에 말이 묻히기도 했다. 그는 지역간대의원그룹의 공동의장이 되어 합법적 야당의 초석을 놓았고, 그해 12월 14일 새 헌법 초안을 다듬던 중 심장마비로 숨졌다.

이 아카이브는 그의 도덕적 진지함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그는 안락한 특권 대신 양심을 택했고, 개별 수감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싸웠다. 동시에 그의 정치 강령은 비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가 꿈꾼 것은 강한 사회보장을 갖춘 수렴형 사회였으나, 그의 권위가 정당성을 실어 준 정치 흐름은 그의 사후 소련 해체와 1990년대의 충격요법으로 귀착했다. 산업 붕괴와 평균수명의 급락이라는 그 결과는 사하로프 자신의 인도주의적 전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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