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Сахаров
소련 반체제 인사 소련 러시아 1921–1989 → 유형 1980

수소폭탄을 만들고, 체제에 등을 돌린 물리학자

1986년 12월 15일 고리키의 아파트에 전화가 놓였고, 다음 날 고르바초프가 직접 전화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오십시오." 사하로프는 감사 인사와 동시에 정치범 석방을 꺼냈다. 7년 가까운 유형이 끝났지만 그는 양심의 의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그 특권을 내려놓은 양심. 결정적 이탈은 1967년 7월 21일 미사일방어 배치에 반대한 비밀 서한과, 1968년 5월 완성되어 지하 출판으로 유통된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성찰」을 거치며 이루어졌고, 그 후 무기 연구에서 배제되었다. 그해 8월 체코슬로바키아 진입도 비판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다 1980년 고리키로 유형당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전화 한 통으로 돌아와, 인민대의원 자격으로 연단에서 싸우다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53년 8월 12일, 세미팔라틴스크의 섬광

1953년 8월 12일 새벽,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 위로 소련 최초의 수소폭탄 RDS-6s가 섬광을 뿜었다. 핵분열 물질과 융합 연료를 겹겹이 쌓은 이른바 「슬로이카(층쌓기 케이크)」 설계의 핵심 착상을 내놓은 사람은 서른두 살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였다. 그는 1948년 이고리 탐의 그룹에 합류한 이래 열핵무기 이론에 몰두했고, 실험 성공 직후 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젊은 축에 드는 정회원으로 선출됐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핵 독점을 과시하던 시대에, 소련의 수소폭탄은 일방적 핵 위협의 시대를 끝내고 전략적 균형을 세운 사건이었다. 사하로프 자신도 당시에는 이 일을 평화를 지키는 노동으로 이해했고, 1955년의 2단계 열핵폭탄 RDS-37 실험까지 설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국가는 그에게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세 차례 수여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실험들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대기권 핵실험의 방사성 낙진이 문턱값 없이 세계 인구에 누적 피해를 준다는 계산을 발표했고, 1961년 초대형 폭탄 실험 재개를 둘러싸고 흐루쇼프와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대기권·수중·우주 핵실험을 금지한 1963년 모스크바 조약의 성립에는 실험 당사자였던 사하로프의 집요한 문제 제기가 한몫을 했다. 무기를 만든 손이 무기를 묶는 조약을 도운 셈이었다.

1968년의 「성찰」, 수소폭탄의 아버지가 반체제로 가는 길

사하로프의 전향은 하루아침의 회심이 아니라 20년에 걸친 점진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그는 대기권 핵실험의 방사능 낙진이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 갈 것이라 계산하고 실험 중단을 지도부에 촉구했다. 1961년 그는 흐루쇼프 앞에서 초대형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했다가 공개적으로 면박을 당했다.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의 성립에는 그의 집요한 설득이 한몫했다고 평가된다.

1968년 그는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성찰」을 썼다.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 두 체제는 수렴할 수밖에 없으며, 지적 자유 없이는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다는 논지였다. 지하 출판으로 퍼진 글이 뉴욕타임스에 전문 게재되자 당국은 그를 모든 기밀 연구에서 배제했다. 특권의 정점에 있던 과학자는 그렇게 인권운동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1970년 그는 인권위원회를 공동 창설했고, 정치범 재판마다 방청석에 나타나는 것으로 항의했다. 1975년 소련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출국이 금지되어 아내 옐레나 본네르가 대신 수상 연설을 읽었다. 「나라의 양심」이라는 별칭이 이 무렵 굳어졌다.

고리키 유형 7년, 그리고 1986년 12월의 전화 한 통

197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하자 사하로프는 외국 언론에 침공을 공개 비판했다. 이듬해 1월 그는 재판 없는 행정 조치로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도시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로 추방되었다. 7년의 유형 동안 그는 계단참의 감시원, 도청, 원고 탈취 속에서 지냈고, 아내 본네르의 치료와 출국을 요구하며 세 차례 단식투쟁을 벌여 강제 급식까지 당했다. 그 사이 서방에서는 그의 석방이 미소 관계의 시금석이 되었다.

1986년 12월 어느 날, 감시원들이 그의 아파트에 전화기를 설치했다. 다음 날 걸려 온 전화의 목소리는 고르바초프였다. 모스크바로 돌아와 「애국적 활동」을 재개하라는 통보였다. 이 전화 한 통은 글라스노스트가 선전이 아님을 국내외에 알린 가장 극적인 신호였다.

돌아온 사하로프는 사면이 아니라 신념의 승인으로 복귀를 받아들였고, 남은 3년을 정치범 전원 석방과 개혁의 급진화를 요구하는 데 썼다. 한때 그를 가둔 권력과 협력하면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만년의 사하로프가 택한 자리였다.

1987–1988, 유형에서 돌아온 뒤: 공론장으로의 복귀

고리키 유형이 끝난 1986년 12월 말, 사하로프는 곧바로 공론장으로 돌아왔다. 1987년 2월 14일 그는 국제 포럼 「핵 없는 세계를,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에서 유형에서 풀려난 뒤 첫 공개 연설을 했다. 요지는 대륙간 미사일과 중·단거리 미사일 감축을 「묶음(package)」 원칙에 매이지 않고 다루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이내 고르바초프의 지지를 얻었고, 그해 12월 중·단거리 미사일을 폐기하는 조약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3월에는 니컬러스 베텔 경의 제안으로 유럽의회가 제정한 「사상의 자유를 위한 상」이 그의 이름을 붙이는 데 동의했는데, 이 상은 유형에서 풀려난 직후 만들어졌고 1988년 첫 수상자는 넬슨 만델라와 아나톨리 마르첸코였다.

1988년 6월 3일 그는 외국 언론과 소련 언론이 함께 참여한 첫 전면 공개 모스크바 기자회견을 열었다. 세 시간이 넘는 자리에서 그는 군축 교섭, 양심수, 거주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 크림 타타르인 귀환 금지,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다뤘고, 스탈린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기 최초의 독립 시민 결사들을 세우는 데 참여했다. 1988년 6월 25일 당국이 처음 허가한 메모리알 집회에서 연설했는데, 생애 첫 집회 연설이었다. 이어 메모리알 시민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됐고, 7~8월에는 토론 클럽 「모스크바 재판정」 발기인 그룹에 합류했다. 1988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는 불가피하다」와 「사상은 사상으로만 맞설 수 있다」를 발표했다.

1988년 11월 6일 그는 정치국이 해외 여행 금지를 푼 뒤 생애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 미국과 프랑스를 방문했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조지 부시 당선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을 만났다. 12월 13일 소련으로 돌아왔다. 해외 여행 금지 해제 시점에 대해서는 사료가 엇갈리므로, 확인되는 11월 6일 출국 사실만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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