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로 집권해 '칠레식 사회주의'를 실험하다 군사 쿠데타로 쓰러진 마르크스주의 대통령
“나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나는 인민의 충성에 목숨으로 보답할 것이다.” — 마지막 라디오 연설, 라 모네다, 1973년 9월 11일
세계 최초로 선거로 집권한 마르크스주의 국가원수. 구리 국유화·농지개혁·사이버신 계획을 통해 평화적 '칠레식 사회주의'를 실험했으나,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경력 연표
- 1932칠레대학교 의학부 졸업
- 1933칠레 사회당 창당 참여 — 체포되어 6개월 수감
- 1938–1942인민전선 정부 보건부 장관 — 빈민층에 최초 의료 접근권
- 1945–1970상원의원 — 상원의장(1966–1969)
- 1952, 1958, 1964인민행동전선(FRAP) 대선 후보 — 세 차례 낙선
- 1970인민연합 후보로 대통령 당선(36.6%) — 10월 24일 취임
- 1970–1973구리 국유화, 농지개혁, 사이버신 — '칠레식 사회주의' 실험
- 1973.09.11군사 쿠데타 — 라 모네다에서 최후 라디오 연설 후 자결
구리의 날: 전례 없는 자원 국유화
아옌데 정부의 가장 상징적인 정책은 1971년 구리 국유화였다. 당시 칠레 구리 산업은 미국의 아나콘다(Anaconda)와 케네콧(Kennecott) 두 기업이 추키카마타, 엘테니엔테, 엘살바도르 등 주요 광산을 소유해 전체 생산의 80% 이상을 통제했으며, 구리는 칠레 대외 무역 수입의 약 4/5를 차지하는 국가 경제의 핵심이었다.
1971년 7월 11일, 칠레 의회는 구리 광산의 전면 국유화를 위한 헌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좌파뿐 아니라 기독교민주당과 우파까지 찬성한 이 결정은 칠레 정치권 전체가 자원 주권을 국가적 명분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7월 16일 법률 17.450호가 공포되며 즉시 발효되었고, 이날은 '국가 존엄의 날'(Día de la Dignidad Nacional)로 선포되었다.
국유화의 핵심은 '초과이윤'(excess profits) 공식이었다. 아옌데 정부는 미국 기업들이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전 세계 평균 이윤율인 12%를 초과해 칠레에서만 7억 7,400만 달러의 추가 이윤을 거두었다고 계산했다. 이 초과이윤이 광산들의 장부가치를 상회했기 때문에, 감사원은 1971년 10월 세 주요 광산에 대한 보상을 0달러로 책정했다. 미국 국무부는 즉각 이를 '국제 관행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라고 비난했고, 닉슨 행정부는 대출 차단과 경제적 압박으로 대응했다.
1973년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아니콘다에 2억 5,000만 달러 이상의 보상금을 지불했으나, 광산 자체는 국유 상태로 유지했다. 오늘날까지도 칠레 구리는 국영기업 코델코(Codelco)가 관리하며 국가 재정의 주요 기둥으로 남아 있다.
농지개혁: 라티푼디움 체제의 종말
아옌데 정부의 또 다른 핵심 정책은 구리 국유화와 함께 '칠레식 사회주의'의 두 기둥을 이룬 농지개혁이었다. 1950년대 중반 칠레 농촌은 식민 시대에 뿌리를 둔 라티푼디움(latifundium) 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전체 농지 소유주의 14%에 불과한 대지주들이 경작지의 92%를 통제했고, 농업 노동력의 66%는 이 대농장(펀도)에 사실상 예속되어 진흙 바닥의 판잣집에서 살며 현물 임금을 받았다. 대지주들은 가용 농지의 18%만 경작하고 나머지는 유휴지로 방치했다.
전임자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1967년 제정한 농지개혁법은 전체 대상 토지의 약 34%를 재분배하는 데 그쳤으나, 아옌데는 이 법적 도구를 최대한 활용해 개혁을 급진화했다. 그의 임기 3년 동안 약 1천만 헥타르의 토지가 수용되어 농민 가족들에게 이전되었고, 약 4,400개의 농장이 농업 노동자들이 생산과 소유에 참여하는 협동조합 체제로 전환되었다. 전체적으로 칠레 농지의 약 59%가 개혁 과정에서 재분배되었다.
아옌데는 마푸체(Mapuche)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토지 반환에도 착수했다. 마푸체족을 위해 가족 농장, 협동조합, 라디오 방송국, 의료 클리닉이 설립되었고, '조상의 땅이 불법적으로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원주민 공동체의 토지 점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72년 원주민법(법률 17.729호)이 통과되어 원주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법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개혁은 대지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1970년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대규모 목축업자들은 소 떼를 도살하기 시작했고, 티에라델푸에고의 목축협회는 13만 마리의 새끼를 밴 암소와 36만 마리의 암송아지를 도축장으로 보냈다. 아르헨티나 접경 지역의 목장주들은 가축 떼를 국경 너머로 빼돌렸다. 이와 함께 지주들의 사보타주는 식량 부족과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
1973년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가차 없는 '농지 역개혁'을 단행했다. 수용지의 약 30%가 이전 소유주에게 반환되었고 5%는 경매에 부쳐졌다. 개혁으로 조성된 협동농장들은 개별 사유지로 분할되었고, 5천 명 이상의 농민 지도자가 가족과 함께 토지에서 쫓겨났다. 농지개혁법과 농민 노조법은 폐지되었고, 농촌은 신자유주의적 농업경제 모델로 재편되었다. 칠레에서 가장 상징적인 물 사유화 사례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사이버신: 사이버네틱스 계획경제 실험
아옌데 정부의 가장 독창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는 영국 사이버네틱스 학자 스태퍼드 비어가 설계한 '사이버신'(Cybersyn, 스페인어로는 Synco)이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추진된 이 시스템은 전국 국유 기업을 텔렉스 네트워크(Cybernet)로 연결해 생산 데이터를 산티아고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로 실시간 전송하고, 통계 소프트웨어(Cyberstride)가 이상 징후를 조기 경보하며, 경제 시뮬레이터(CHECO)를 통해 정책 효과를 예측하도록 설계되었다. 미래형 운용실(Opsroom)에는 7개의 회전 의자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관리자들이 데이터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사이버신은 소련식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와 달리, 비어의 '실행가능 체계 모델'(VSM)에 기초해 공장 노동자들에게 자율적 의사결정권을 부여하는 분산형 통제를 지향했다. 이는 트로츠키의 소비에트 관료제 비판에서도 영향을 받은 설계였다. 시스템은 1972년 10월 보수적 트럭 소유주들의 전국 파업 당시 정부가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기업들의 정보를 연결해 물류를 유지하는 데 실질적 도움을 주었다.
비어는 시민들이 TV 방송에 대한 실시간 만족도를 정부에 전송하는 '사이버포크'(Cyberfolk) 프로젝트도 구상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1973년 쿠데타 이후 군부는 사이버신을 '평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운용실을 파괴하고 프로젝트를 폐기했다.
1973년 쿠데타와 최후: 라 모네다의 함락
1973년 여름, 칠레는 내전 직전의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6월 29일 로베르토 수페르 중령의 전차 부대가 라 모네다를 포위한 '탕케타소'(Tanquetazo)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이는 본격적인 쿠데타의 예고편이었다. 8월 22일 하원은 아옌데 정부가 '전체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군대에 개입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81대 47로 통과시켰다. 아옌데는 이에 대해 '의회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대항해 무장 기관을 소환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8월 24일 카를로스 프라츠 장군이 육군 총사령관에서 사임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73년 9월 11일 오전 6시, 해군이 발파라이소를 점령하며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오전 8시경 육군이 산티아고의 라디오·TV 방송국을 폐쇄했고, 군부는 '칠레를 마르크스주의 멍에로부터 구한다'는 첫 포고령을 발표했다. 아옌데는 측근 경호대(GAP)와 함께 라 모네다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피노체트와 공군 사령관 구스타보 레이는 대통령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았다. 군부는 아옌데에게 가족과 함께 망명 비행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는 '선거로 부여받은 직무를 위협 앞에 저버릴 수 없다'며 거부했다.
오전 9시 10분,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산당 계열 라디오 마가야네스를 통해 아옌데는 역사에 남을 마지막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나는 인민의 충성에 목숨으로 보답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된 연설에서 그는 '외국 자본과 제국주의, 반동 세력이 군대의 전통을 파괴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진단하고, "조만간 자유인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걸어갈 거대한 가로수가 다시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공군의 호커 헌터 전투기가 라 모네다를 폭격했고, 세르히오 아레야노 장군의 기갑부대가 진격했다. 건물은 화염에 휩싸였고, 오후 2시경 방어선이 무너졌다. 아옌데는 집무실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자동소총으로 턱 아래 두 발을 발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1년 국제 법의학팀의 부검 결과 자살이 공식 확정되었으나, 관에서는 약 30발의 총탄이 발견되어 쿠데타군이 이미 숨진 대통령의 시신을 난사했음이 드러났다.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사평의회는 17년간의 독재를 시작했고, 의회 해산, 정당 금지, 국립경기장을 수용소로 삼은 대규모 체포와 고문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