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가장 먼저 진입한 기갑군 사령관, 스탈린 사후 밀려나다
「소비에트 국가의 적들과 싸운 전선에서 내 아들과 세 형제, 누이가 죽었다」 — 1956년 강제 퇴역을 앞두고 올린 사직 청원에서
소련 기갑군 최고의 실전 지휘관 중 한 명.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쳐 붉은 군대에 몸담았고, 1938년 체포·수감되었다가 1939년 복권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루블린-브레스트, 비스와-오데르, 동포메라니아, 베를린 공세 등 결정적 전역을 지휘했으며, 그의 부대는 1945년 4월 베를린 시내에 가장 먼저 돌입한 소련군이었다.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1948~1953)으로 소련 전차 병과 전체를 이끌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되어 1956년 건강 악화로 퇴역했다.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와 기갑군 원수 계급을 받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1930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5–1918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 소위까지 진급
- 1918–1930붉은 군대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탐보프 반란 진압 참전
- 1930–1938연대장·기계화여단장, 1938년 체포·수감
- 1940–1943복권 후 전차사단장·기계화군단장,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 참전
- 1943–1947제2(근위)전차군 사령관, 베를린 최초 진입 부대 지휘
- 1948–1953소비에트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 1953–1956제7기계화군 사령관 → 기갑군사관학교장,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
관련 역사 사건
1938년 체포와 1939년 판결, 그리고 사후 복권
1938년 5월 1일, 제9기계화여단을 지휘하던 대령 세묜 보그다노프는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체포되었다. 혐의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형법 제58조의 두 항목, 곧 반혁명 범죄였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에서 연대장과 여단장까지 올라온 지휘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곧 붉은 군대에서 제적되었고 1939년 10월까지 수감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1939년 10월 27일 소비에트 연방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판결은 두 갈래였다. 제58조의 반혁명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인정되었으나, 직무상 태만(형법 제193조의 17)으로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사면을 적용해 그를 곧바로 석방했다. 반혁명 혐의로 기소된 지휘관이 그 부분에서는 벗겨지고 직무상 과실로는 유죄가 된 뒤 사면으로 풀려나온 것이다. 이 유죄 판결은 1942년에 효력을 잃었고, 1968년 최고재판소는 그를 완전히 복권했다. 사후의 일이었다.
그는 1939년 12월 붉은 군대에 복귀했으나 몇 달 동안 새 보직을 받지 못했고, 1940년 3월에야 서부특별군관구 제29차량화사단의 부사단장 겸 보병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당적 문제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1931년부터 후보 당원이었던 그는 1938년 체포와 함께 당에서 제적되었으나 1942년 정식으로 입당했다. 그가 전차군단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를 지나던 시기에도 1938년의 기록은 남아 있었고, 그것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그가 죽은 뒤인 1968년이었다. 이후 그는 기갑군 원수가 되어 소련 전차 병과 전체를 지휘했고, 1956년 건강을 이유로 본인의 청원으로 퇴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