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73 ○ 자연사

말 탄 내전의 전설, 기계화 시대까지 살아남은 원수

1941년 9월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키예프 돌출부에서의 철수를 스타브카에 전보로 건의했으나 스탈린에게 해임되었고, 뒤이어 남서방면군 주력이 포위되었다.

돈 지역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징집되어 제정 러시아 기병으로 복무하며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을 받았고, 내전에서는 제1기병군을 이끌어 백군을 격파했다.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고, 대숙청에서는 부하린·리코프 처형을 요구하고 투하쳅스키 재판의 특별재판부에 참여했으나 자신도 수사 대상이었다. 1941년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 키예프 돌출부 철수를 건의했다가 스탈린에게 경질되어 다시는 야전군을 지휘하지 못했고, 전후에는 농업부 차관으로 군마 육종을 맡았다. 기병의 시대를 고집한 인물로 기억되지만 직접 낙하산 강하를 시험하고 기계화기병집단 편성을 주도했으며, 1973년 10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제1기병군의 내전 기록: 전설과 학살 사이

제1기병군은 1919년 11월 17일 부됸니의 제1기병군단을 기반으로 창설되었고, 그가 지휘하던 제4·제6·제11사단이 그대로 편입되었다. 그 상승의 배경에는 스탈린의 후원이 있었다. 부됸니는 1918년 차리친에서 스탈린, 보로실로프와 만나 이후 오래가는 동맹을 맺었다.

1919년 가을 부됸니의 기병은 백군 기병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처음으로 승리해 보로네주를, 이어 카스토르노예를 점령했다. 11월 17일 쿠르스크 이후에는 남쪽으로 하리코프를 거쳐 진격해 1920년 1월 6일 타간로크를, 이틀 뒤 로스토프를 차지했다. 해빙으로 진격이 멈춘 동안 부됸니의 부대는 로스토프의 병원을 불태웠고, 그 안에는 부상당한 백군 장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은 무공과 무규율을 함께 남긴다. 부됸니가 1919년 11월부터 1923년 10월까지 지휘한 제1기병군은 북캅카스, 크림, 북타브리다에서 데니킨과 브란겔 격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0년 1월 북캅카스에서는 백군 기병에게 두 차례 패했고, 로스토프 점령 뒤에는 대규모 약탈과 부대 해체가 시작되었다. 제8군 참모부가 모스크바로 보낸 전보는 약탈과 음주, 열차 강탈을 보고했으며, 트로츠키는 로스토프 위수사령관 파르호멘코의 체포를 요구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제1기병군에게 나쁘게 끝났다. 리보프 점령에 실패한 뒤 코마루프에서 폴란드 정규 기병에게 패했고,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회전 중 하나였다. 부대는 소련 통제 지역으로 후퇴했고, 이어 내전의 마지막 국면인 크림 재점령에 참여했다.

1920년 바르샤바에서의 퇴각은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약탈과 폭력으로 기록되었고, 제1기병군 일부 부대는 유대인 마을에 대한 포그롬으로 오명을 남겼다. 부됸니 자신의 명령으로 유죄 부대가 무장 해제되었으며, 여기에는 제6기병사단 제31·32·33연대가 포함되었다. 약 400명의 책임자가 재판에 넘겨져 총살 또는 5~2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고, 포그롬 방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으로 사단장 I. R. 아파나센코를 포함한 사단 지휘부가 교체되었다.

부대의 명성은 공식 선전의 영역에만 있지 않았다. 이사크 바벨은 폴란드에서 부됸니의 기병과 함께 행군한 뒤 『기병대』 연작을 발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에 부됸니는 격노했고, 1924년 3월에는 '문학적 퇴폐자'의 '중상'으로부터 『기병대』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막심 고리키가 바벨을 옹호했으나, 부됸니는 1928년 고리키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바벨을 '노골적이고 의도적이며 오만한 중상'으로 다시 공격했다.

기병 대 기계화: 투하쳅스키와의 논쟁

부됸니는 붉은 군대 내에서 기병의 가장 완강한 옹호자였으며, 전차와 기계화 부대의 독자적 운용을 주장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1924년부터 1937년까지 기병 감찰관으로 재직하며 그는 "기병은 결코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투하쳅스키의 '심층작전' 이론과 독립 기갑군단 창설 구상을 '파괴공작'(wrecking)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1939년 전차의 중요성을 설명받은 자리에서 남긴 "나를 설득하지 못할 걸세. 전쟁이 터지면 모두가 '기병을 불러!'라고 외칠 테니까"라는 발언은 기계화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이 논쟁은 단순한 교리 대립을 넘어 정치적 차원으로 비화했다. 1937년 6월 11일, 부됸니는 소련 대법원 특별재판부의 일원으로 투하쳅스키와 7명의 고위 장교들에 대한 '반소비에트 군사 파시스트 음모' 사건 재판에 참여해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 증언에서 그는 투하쳅스키의 독립 전차군단 구상이 "기병보다 열등하고 비논리적이어서 고의적 파괴공작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부하린과 리코프에 대해 "재판에 넘겨 총살하라"고 요구했고, 투하쳅스키와 루주타크의 제명 안건에는 "찬성. 이 쓰레기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적어 보냈다.

그러나 부됸니가 단순히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기병의 기동성을 살린 '기계화기병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е соединения)'의 편성을 주도했고, 1931년에는 직접 낙하산 강하 훈련에 참가하는 등 새로운 전술을 배척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예측과 달리 대규모 기병 돌격은 사라졌지만, 소련군은 전쟁 내내 80개 이상의 경기병 사단을 운용했으며 기병은 정찰과 기동타격 임무에서 유용성을 입증했다. 전후 부됸니는 군마 육종 사업에 전념해 자신의 이름을 딴 '부됸놉스카야' 품종을 완성했고, 이 말은 스포츠와 내구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러시아에서 지금도 사육되고 있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