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
소련 러시아 1923–1991 ✕ 자살

INF 조약을 협상한 소련군 원수, 제국의 종말을 견디지 못하다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미소도 잃지 않고 답했다.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

독소전에 해군보병 장교로 참전해 레닌그라드에서 부상한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을 입안하고 소련군 참모총장(1984~88)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고 군사고문을 맡아 INF 조약 등 냉전 종식 협상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군사개혁과 일방적 군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내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레닌그라드의 참호에서 참모총장까지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는 1923년 모르도비야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해군학교 생도로 전쟁을 맞았다. 열여덟의 해군 보병 소위로 레닌그라드 방어전에 투입된 그는 봉쇄된 도시 앞의 참호에서 가장 혹독한 시기를 보냈고, 동상으로 발을 상하고도 전선을 떠나지 않았다. 그 세대의 많은 군인들처럼, 그에게 군대와 국가는 청춘을 바쳐 지켜 낸 것 그 자체였다.

전후 그는 기갑 병과로 옮겨 야전과 참모의 사다리를 차근차근 올랐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서류와 규정에 정통한 참모장교의 전형이었다. 1974년 참모본부에 들어가 작전총국장과 제1부총장을 지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작전 계획 수립에 관여했다. 참모본부 수뇌부는 개입에 회의적이었다는 기록이 여럿이지만, 결정이 내려지자 그는 군인답게 계획을 짰다.

1983년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84년 참모총장에 올랐다. 소련군 최고의 두뇌라는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역할을 맡게 된다. 군비경쟁을 끝내려는 서기장의 가장 중요한 군사 파트너가 되는 일이었다.

군축 외교와 냉전 종식

아흐로메예프가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은 냉전을 군사적으로 종결시킨 군축 협상에서의 역할이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을 입안한 참모본부 작전총국장 출신이라는 이력은 그를 '매파'로 분류하기에 충분했지만, 1984년 참모총장에 오른 뒤 그는 예상을 뒤엎는 행보를 보였다.

1986년 10월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아흐로메예프는 고르바초프의 군사적 배석자로 참석해 전략무기 50% 감축, 중거리핵전력(INF) 전면 철폐, 유럽 내 단거리 미사일 동결이라는 일련의 파격적인 양보안을 직접 제시했다. 미국 측 협상대표 폴 니츠는 그를 두고 "일급 협상가"라고 평가했다. 레이캬비크에서 전략방위구상(SDI)을 둘러싼 이견으로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 회담은 INF 조약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아흐로메예프는 워싱턴을 여러 차례 방문해 조지 슐츠 국무장관, 윌리엄 크로 제독(합참의장) 등 미국 측 인사들과 협상의 세부를 조율했다. 그의 실무적이고 솔직한 태도는 상대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크로는 그를 "공산주의자, 애국자, 그리고 친구 — 그 순서대로"라고 회고했다. 1987년 12월 9일 국무부에서 열린 니츠와의 회담록에는 아흐로메예프가 대륙간탄도미사일 투사중량 50% 감축, 중폭격기 산정 규칙 등 기술적 쟁점을 조항별로 협의하며 타협을 이끌어내는 모습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INF 조약 협상 과정에서 소련 측에 불리하게 작용한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소련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오카'(SS-23)의 처리였다. 오카의 시험 사거리는 400km로, 조약상 폐기 기준인 500km에 미달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4월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슐츠와의 회담에서 사실상 폐기에 동의해버렸다. 아흐로메예프는 회고록에서 이 결정이 국방부와 참모본부의 의견 수렴 없이 '거의 지나가는 말처럼' 이루어졌다고 탄식했다. 당시 참모본부는 하한선을 400km로 낮추어 미국의 신형 '랜스-2' 미사일까지 함께 금지하는 절충안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외교 채널의 독단으로 무산된 것이다.

아흐로메예프는 군축 협상을 '일방적 양보'가 아닌 균형 잡힌 절충으로 이해했다. 그가 조약을 지지한 것은 핵전쟁 위험을 줄이는 동시에 소련의 전략적 이익을 지키는 선에서 합의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1988년 이후 군사적 균형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감축으로 방향을 틀자, 아흐로메예프는 이에 반발해 사임했다. 사임 후에도 그는 대통령 군사고문으로서 "군대는 조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투입될 수 있다"고 공개 발언하는 등, 자신이 협상으로 지키려 했던 국가가 해체되는 상황을 막으려 애썼다. 냉전 종식의 군사적 설계자였던 그에게 제국의 평화로운 종언은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말이었다.

1991년 8월 24일, 크렘린 집무실의 작별

1988년 12월 고르바초프가 유엔에서 일방 감군 50만을 선언하던 바로 그 시각, 아흐로메예프의 참모총장 사임이 발표되었다. 공식 사유는 건강이었지만, 협상은 지지하되 일방 감축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군인의 선긋기로 읽혔다. 그러나 그는 떠나는 대신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남아, 군의 불만과 개혁 사이에서 다리 노릇을 계속했다.

1991년 8월, 소치에서 휴가 중이던 그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자진해 모스크바로 돌아와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상황 분석을 도왔다. 위원회의 정식 구성원도 아니었고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쿠데타가 무너진 뒤인 8월 24일, 그는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살 수 없다.」 가족에게 남긴 쪽지와, 실패한 첫 시도까지 담담히 적은 기록이 함께 발견되었다. 장례 며칠 뒤 도굴꾼들이 무덤을 파헤쳐 원수 예복을 훔쳐 갔다. 시대의 밑바닥을 보여 주는 마지막 모욕이었다.

미국의 군인들은 협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던 이 원수를 정직한 군인으로 기억했고, 합참의장을 지낸 크로 제독은 공개적으로 조의를 표했다. 역사가들에게 그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국가와 자신을 분리할 수 없었던 소비에트 군인 세대 전체의 부고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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