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해빙 노선의 콤소몰 수장이자 모스크바 올림픽을 이끈 체육 장관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경력 연표
- 1952–1959콤소몰 전임 간부로 활동, 모스크바 시당 콤소몰 제2서기·제1서기
- 1959–196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셸레핀의 후계자로 청년동맹 지휘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63≪프라우다≫ 기사로 ≪노비 미르≫·솔제니친·에렌부르크 공격
- 1965≪프라우다≫ 기사에서 1930년대를 부정적 일변도로 보는 풍조 비판
- 1968–1983소련 체육·스포츠 위원회 의장, 15년간 스포츠 행정 총괄
- 1972소련-캐나다 아이스하키 슈퍼시리즈 성사 주도
- 1977–1983소련 올림픽 위원회 초대 위원장
- 1980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조직 총괄
- 1983–1985주몽골 소련 대사
- 1985–1989주버마 소련 대사, 이후 강제 은퇴
콤소몰 시절의 이념 투쟁
파블로프가 콤소몰 제1서기로 재임한 9년(1959~1968)은 소련 청년동맹 역사상 가장 정치화된 시기 중 하나였다. 셸레핀이 키운 조직적 후계자로서 그는 콤소몰을 단순한 청년 동원 기구가 아니라 당 내 이념 투쟁의 전위로 재편하려 했다.
그의 첫 번째 전국적 공격은 1963년 3월 《프라우다》에 실린 기사였다. 파블로프는 문예지 《노비 미르》가 일리야 에렌부르크의 회고록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중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게재한 것을 두고, "우리 사회의 부정적 측면만을 부풀린다"고 맹비난했다. 이어 기자회견에서 예브게니 예프투셴코를 직접 겨냥하며 해빙기 문학 전반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더 큰 충격파는 1965년 8월 29일자 《프라우다》에서 터져 나왔다. 파블로프는 흐루쇼프 실각 이후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스탈린 비판의 흐름을 되돌리려 시도했다. 그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이론가와 작가들이 개인숭배의 부정적 결과라는 프리즘만으로 사회주의 사회 역사의 전체 단계를 바라보는 일방적 접근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이러한 일방성은 애국심 함양에도,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올바로 이해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컨대 1930년대는 오로지 어두운 색조로만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대숙청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자는, 브레즈네프 시대의 신스탈린주의로 가는 길목을 연 발언이었다.
파블로프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개인 신념을 넘어 셸레핀 그룹의 집단적 이념 노선이었다. 연구자 니콜라이 미트로힌에 따르면, 파블로프 주변의 콤소몰 중앙위 간부들은 '파블로프 그룹'을 형성하여 급진적 반서방주의, '국가주의자' 스탈린 숭배, 반유대주의, 낭만적 민족사관을 공유했다. 이들은 콤소몰을 발판 삼아 당 전체의 이념 방향을 우경화시키려 했고, 이는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한 핵심 이유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