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핌 파블로비치 슬라프스키

Ефим Павлович Сла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91 ○ 자연사

29년간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한 '위대한 예핌'

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알루미늄에서 플루토늄까지: 원자폭탄으로 가는 길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슬라프스키는 비철금속 공장 책임자였다.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자포로제)과 우랄 알루미늄 공장(카멘스크-우랄스키)을 거쳐 1945년 소련 비철금속 인민위원부 부위원이 되었다. 1946년 그는 갑자기 제1총괄국(PGU) 부국장으로 발탁되어 원자폭탄 개발 계획에 투입되었다. PGU는 라브렌티 베리야가 총괄하던 핵무기 비밀 기구였다. 1947년 슬라프스키는 남부 우랄의 첼랴빈스크-40(현 오조르스크)에 건설 중인 제817복합체의 소장 겸 수석 기술자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소련 최초의 산업용 원자로와 플루토늄 분리 시설이 들어서는 장소였다. 1949년 8월 29일, 제817복합체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으로 만든 첫 원자폭탄 RDS-1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이 공로로 슬라프스키는 보리스 반니코프, 이고리 쿠르차토프, 율리 하리톤과 함께 첫 번째 사회주의 노동 영웅 훈장과 스탈린 상을 받았다. 알루미늄 공장의 생산 관료에서 핵무기 개발의 핵심 책임자로 변모한 이 경험은 이후 30년 가까이 소련 핵산업 전체를 지휘하게 되는 정치적·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키시팀 사고와 방사능 제염 (1957년)

1957년 9월 29일, 슬라프스키가 플루토늄 생산을 지휘했던 마야크 복합체(콤비나트 817호)의 방사성 폐기물 저장탱크가 냉각 장치 고장으로 폭발했다. 2만 퀴리에서 2천만 퀴리로 추정되는 방사능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고, 동시베리아 횡단 300km×50km의 '동시베리아 방사능 흔적'이 형성되었다. 이 사고는 체르노빌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핵 사고였다.

슬라프스키는 즉시 사고 수습 책임을 맡아 오체르스크·체르냅스크 등 오염 지역 주민 1만여 명을 긴급 소개하고, 방사능이 집중된 토양을 굴착해 매립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했다. 1958년 봄에는 가장 오염이 심한 호수 카라차이와 테차 강 수계를 격리하기 위한 광범위한 토목 공사에 착수했다. 이때 개발된 오염 토양 굴착·매립 공법과 격리 구역 설정 방식은 30년 후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슬라프스키는 평소처럼 방호복만 입은 채 고방사능 구역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후일 의사들이 추산한 그의 누적 피폭량은 약 1,500뢴트겐으로 치사량의 세 배에 달했다. 1990년에야 비로소 공개된 이 사고의 은폐 결정은 흐루쇼프와 중앙위원회의 정치적 판단이었으며, 슬라프스키 자신은 사고 수습에 전념한 현장 지휘관이었다. 키시팀 사고 수습 경험은 이후 소련 원자력 산업의 비상 대응 체계 수립에 결정적인 선례가 되었다.

체르노빌과 1986년 퇴임 (1986년)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 사고가 나자, 당시 87세였던 슬라프스키는 사고 수습을 위한 건설 위원회 책임자로 임명되어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는 피해 규모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프리피야티로 갔고, 사고 원자로를 덮을 보호 구조물(석관) 계획을 구상했다는 것이 전하는 기록이다. 석관 설계를 그가 직접 맡았다는 대목은 확정된 공학적 공적으로 단정하기보다 해당 자료의 서술로 제시하는 편이 정확하다.

체르노빌 수습은 그의 장관 경력의 종점이 되었다. 1986년 11월 21일, 88세의 나이로 그는 퇴임했고 전연방적 중요성을 지닌 개인 연금 수급자가 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측 자료도 1986년 11월 이후 그가 모스크바에서 같은 지위의 연금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다만 이 퇴임을 체르노빌 사고의 직접 결과로 보는 설명은 경합한다. 러시아 리아노보스티는 체르노빌 참사에 그가 깊은 충격을 받았으나 그것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며 미하일 고르바초프와는 그가 스타브로폴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관계가 나빴다고 전한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체르노빌 이후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퇴임이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고 소련 내각에서 밀려난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고 기록한다. 퇴임이 자발적이었는지, 사고 때문이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서술되므로 단정하지 않고 병기한다. 이미 1957년 키시팀 사고 수습으로 축적된 제염·격리 경험이 체르노빌 수습에도 적용된 것으로 보이며, 슬라프스키에게는 두 차례의 대형 원자력 사고 수습 현장이 모두 그의 책임 아래 놓였던 셈이다. 1986년의 퇴임은 소련 핵산업을 29년간 이끈 한 인물의 마지막 공식 직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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