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귀족에서 카자흐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된 국제주의 혁명가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4–1926 외교·국제활동 · 소련
경력 연표
- 1902–06SDKPiL 입당, 1905-06년 주이사회 위원
- 1906–124년 강제노동형 후 이르쿠츠크 영구유형, 1912년 크라쿠프로 탈출
- 1917.10–11중앙전신국 인민위원 → 국가은행 인민위원
- 1917–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스탈린 보좌)
- 1919–20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 1920–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정치총국장
- 1924–26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
- 1926–37MOPR 중앙위 부의장,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관련 역사 사건
키르혁명위원회 의장과 카자흐 소비에트 국가 건설
1919년 7월 10일 인민위원회는 '키르기스(카자흐) 변강 관리 혁명위원회', 곧 키르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의장에 페스트콥스키를 임명했다. 그는 카자흐 대의원들이 서로의 승격을 막아버린 상황에서 스탈린이 동의한 '중립적 인물'이었다. 알라시 운동의 핵심인 아흐메트 바이투르시노프와 바흐트잔 카라타예프 등 카자흐 민족 지식인을 위원회에 끌어들인 것은 모스크바의 의도된 행보였다. 레닌과 스탈린은 '백군'에 배신당한 알라시 지도부를 소비에트 건설로 흡수함으로써 민족 지식인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고, 바이투르시노프는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페스트콥스키는 이 이질적인 동료들 사이에서 조정자로 분투했다. 그는 레닌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이투르시노프와 툰간친이 연합하여 자기 편 인물을 협력 위원으로 끌어들여 표결을 장악하고 있다고 토로하며 스스로 '무력함'을 고백했다. 오렌부르크에 자리 잡은 키르혁명위원회는 러시아인 지방 간부들의 '대러시아 쇼비니즘'에 맞서 싸워야 했고, 방조차 얻지 못해 사인(私人) 주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무·재정·교육·법무·농업 등 부서를 세워 훗날 카자흐 자치공화국의 골격을 마련했고, 1919년 말에는 138명이 일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키르혁명위원회는 1920년 8월 26일 키르기스(카자흐) 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산되었으며, 페스트콥스키의 15개월 의장 임기는 카자흐스탄의 첫 소비에트 정부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