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 계획의 설계자, 소련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한 급진 개혁파 경제학자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경력 연표
- 1958–1959재무부 산하 재정연구소 경제연구원
- 1959–1965고스플란 산하 경제연구소(NIEI) 연구원
- 1965–1976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부소장·부문장
- 1970–1983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수리경제분석학 주임교수
- 1974 / 1987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
- 1976–1986전연방체계연구소 수석연구원, MIPT 일반경제학 강의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과학기술진보경제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9.12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
- 1989–1996과학아카데미·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 1990500일 계획 작업반장,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통합민주당 창당 조직위원장, '개혁' 국제재단 이사장
- 1991.6러시아 대통령선거 옐친 신임인
관련 역사 사건
500일 계획: 소련 시장전환의 분수령
1990년 여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공동 합의로 샤탈린이 이끄는 작업반이 구성되었다. 한 달의 강행군 끝에 400쪽 분량의 보고서 《시장으로의 이행》이 완성되었고, 9월 4일 《이즈베스티야》에 전문이 게재되었다. 통칭 '500일 계획'은 명시적으로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사유재산·가격자유화·전면적 사유화를 제안한 최초의 소련 공식 문서였다. 핵심 명제는 '국가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빼앗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계획은 4단계로 구성되었다. 첫 100일: 주택·토지·소규모 기업의 사유화, 대기업 주식회사화, 국가은행 기반의 준비제도 창설. 다음 150일: 가격 자유화와 대외무역 개방. 그다음 150일: 초기 충격 후 시장 안정화. 마지막 100일: 경제성장 재개. 작업반에는 야블린스키, 야신, 페트라코프, 표도로프, 자도르노프 등 당대 최고의 개혁파 경제학자 13명이 참여했다.
동시에 리즈코프 총리와 아발킨 부총리는 보다 완만한 《기본 방향》을 준비하며 정면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샤탈린은 1990년 초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9월 11일 러시아 최고회의는 500일 계획을 압도적으로 채택했으나, 연방 차원에서는 군산복합체와 당 보수파의 반발 속에 고르바초프가 타협안을 선택하면서 사실상 사장되었다.
비록 채택되지 못했으나, 이 계획은 소련 체제 내에서 시장경제로의 급진적 이행을 공식 의제로 만든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해체 후 옐친 러시아의 개혁, 특히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은 이 계획의 지적·정치적 토대 위에서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