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공업의 사람, 국방장관이 되다
정치국에서 조사위원회가 빈 공장 사진을 내밀자, 우스티노프는 위원회가 떠난 다음 날 직접 찍은 가동 중인 공장 사진으로 맞섰다.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기계 설계를 전공한 기술자로, 1941년 6월 병기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독소전쟁 중 레닌그라드 방위산업의 우랄 대피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독일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흡수해 소련 로켓·핵·우주 산업의 기반을 닦았고, 1957년 각료회의 부의장, 1965년 중앙위 서기로 군수공업 전반을 맡았다. 1976년 그레치코 사망 후 국방장관에 올라 트로츠키 이래 첫 민간 출신 국방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소련 원수로 진급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무력 개입을 정치국에서 가장 강하게 주장한 인물 중 하나였고, 1984년 12월 20일 폐렴과 심장마비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6–1953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41–1946병기인민위원, 전시 무기생산 동원 체계 지휘
- 1946–1953병기장관(1946년 인민위원회가 부로 개편), 전후 군수공업 재편
- 1957–1963각료회의 부의장, 군수공업 전반 총괄
- 1965–1976중앙위 서기, 방위산업 담당 정치국급 원로로 부상
- 1976–1984국방장관, 정치국 정회원으로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관여
- 1953–1957국방공업장관, 군수공업 총괄
- 1963–1965각료회의 제1부의장,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65.03–1976.03
- 정위원 1976.03–1984.12
1984.12 재임 중 사망
관련 역사 사건
군산복합체의 총아 — 전시 생산에서 국방장관까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는 소련 군산복합체의 산 증인이었다. 33세에 병기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독소전쟁(1941-45)의 무기 생산 동원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미사일·핵·우주 산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관여했다. 1965년 중앙위 서기(방위산업 담당)에 오르고 1976년에는 국방장관이 되어 소련 역사상 최초의 민간 출신 국방장관이 되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규모 정치국'의 핵심 원로로서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을 강력히 주장했고, 1984년 그가 사망한 후 원로 그룹의 균형이 무너지며 고르바초프 등장의 길이 열렸다.
우스티노프 독트린 — 유럽 전역의 선제 타격 구상
1976년 우스티노프가 국방장관에 취임하면서 소련의 군사 교리는 결정적 전환을 맞았다. '우스티노프 독트린'이라 불리는 이 전략의 핵심은 유럽 전역에서 전술핵 및 작전·전술핵 무기를 전면 배치하여 NATO의 심층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련은 구식 단탄두 중거리 미사일 R-12(SS-4)와 R-14(SS-5)를 신형 RSD-10 '피오네르'(SS-20)로 교체하기 시작했고, 1983~84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 영토에 OTR-22 및 OTR-23 '오카' 작전·전술 미사일 체계를 배치하여 서독 전역을 사정권에 두었다. NATO 분석가들은 이를 소련이 유럽에서 제한적 핵전쟁을 수행할 태세를 갖추는 증거로 판단했다. 이 독트린은 NATO의 핵 공격 징후가 포착될 경우 소련이 선제적 미사일·핵 타격을 가한다는 '유럽 전략방향 강화' 이론에 기초했다. 소련 참모부의 작전 계획에 따르면 5개 전선군이 서독 방향으로 진격하고, 몰도바 주둔 제14군은 터키로 돌격해 흑해 해협을 장악한 후 이탈리아를 함락시켰다. 13~15일 내에 서독,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 국경까지 도달하며, 30~35일 만에 유럽 대륙 전체에서 NATO를 격파하는 것이 목표였다. 우스티노프 독트린은 소련 말기 군사력의 정점을 상징했으나, 그 과도한 군사적 부담은 소련 경제에 치명적 손상을 남겼다.
계승 위기의 중재자: 소규모 정치국과 트로이카
1970년대 중반부터 브레즈네프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실질적 정책 결정은 이른바 소규모 정치국으로 옮겨갔다. 러시아어 자료는 이 기구를 중요 결정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후 정치국 정회원 투표로 형식적 추인을 받던 곳, 때로는 부재자 투표가 활용되던 곳으로 설명하며, 브레즈네프·코시긴(후에 티호노프)·수슬로프·안드로포프·그로미코·체르넨코·우스티노프를 그 구성원으로 꼽는다. 영국 역사가 조너선 해슬럼은 정치국이 목요일마다 모이던 호두나무 벽판의 오레호바야 방에서 안드로포프·그로미코·우스티노프로 이루어진 트로이카가 실권을 사실상 넘겨받았고, 결정에는 여전히 형식적으로 브레즈네프의 동의가 필요했다고 서술한다.
우스티노프의 비중은 이 국면에서 결정적이었다.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는 크렘린의 킹메이커로 불렸고, 그의 지지는 1982년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의 후임이 되는 데 결정적이었다. 1984년 2월 체르넨코가 취임한 뒤에도 그는 그로미코와 함께 비공식 삼두체제를 이루어 국가를 이끌었으며, 체르넨코의 건강 악화와 군사 문제 경험 부족을 보완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가 1982년과 1984년 각각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서기장 선출을 지지했다고 기록한다. 레오니트 믈레친은 그를 안드로포프 사망 후 정치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하며, 고르바초프가 우스티노프의 서기장 지지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고 전한다. 1984년 체르넨코의 건강이 흔들리던 시기에 그가 젊은 세대로 권력을 넘기는 과도기 지도자로 거론되었다는 동시대 기록도 있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동시대인들에게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30년간 그의 보좌관을 지낸 소련 육군 중장 이고리 일라리오노프는 그를 '모든 인민위원 가운데 가장 스탈린주의적인 인물'로 불렀고, 스탈린이 기존 체제를 유지할 인물로 그를 길렀다고 덧붙였다. 보건부 제4총국장을 지낸 아카데미 회원 예브게니 차조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그의 유일한 실수일 수 있다고 보면서, 그를 모든 문제를 힘의 우위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옛 스탈린주의 '근위대'의 대표자이자 형편없는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평가했다. 또 그는 정치국 안에서 인기를 얻은 개혁도 지지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고위 참모총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원수 및 다수 총참모 장교들과 대립했다. 그들은 브레즈네프에 대한 우스티노프의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를 군부가 아닌 방위산업 이익을 대변하는 로비스트로 보았다.
아프가니스탄 결정에서 그는 소규모 정치국 안에서 안드로포프·그로미코와 함께 개입을 밀어붙인 핵심 축이었다. 일부 자료는 그가 브레즈네프와 함께 파병에 반대했다고 전하나,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브레즈네프가 두 달 만에 끝내겠다고 약속한 전쟁이 길어지자 우스티노프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점을 들어 이를 개연성이 낮다고 본다. 1983년 말 한반도 여객기 격추 사건과 관련해서는 1992년 보리스 옐친이 공개한 다섯 건의 극비 메모가 남아 있다. 1992년 10월 16일 이즈베스티야에 실린 이 문서에 따르면 소련은 격추된 여객기의 '블랙박스'를 회수해 해독했으나, 녹음 내용이 해당 항공편이 미국의 첩보 임무 중이었다는 소련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스티노프와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빅토르 체브리코프는 기록 장치의 보관 사실을 비밀로 하자고 안드로포프에게 건의했다. 고르바초프의 회고록은 그를 평소 정력적이고 영민한 인물로 서술하며, 안드로포프 사망 직후 정치국에서 반대에 부딪힌 고르바초프에게 그가 '굳건히 버티라'고 격려했다고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