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데그탸료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Дегтяр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49 ○ 자연사

DP-27·DShK·PTRD를 설계한 소련 소형화기 설계의 창시자

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말년, 죽음, 그리고 기념

종전 무렵 데그탸료프의 건강은 크게 나빠졌다. 그는 1945년 5월 21일부터 9월 1일까지 휴가를 냈고, 9월 16일에는 수보로프 1급 훈장을 받았다. 그의 설계국은 코브로프 공장에서 분리되어 독립 특별설계국(OKB)으로 개편되었으며, 공장 자체는 오토바이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1948년 초 모스크바의 병원에 입원한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자서전을 구술했고, 그 기록은 1951년 게르만 나가예프의 문학적 정리를 거쳐 《나의 삶》으로 출간되었다. 1949년 1월 16일 그가 사망하자 시신은 전용 열차로 코브로프에 옮겨져 1월 19일부터 20일까지 공장 클럽에서 조문을 받았고, 요안노-보인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다. 관은 포가에 실려 묘지로 운구되었으며, 네 번째 스탈린상은 사후에 주어졌다.

사망 당일 소련 각료회의 결정으로 그의 이름을 딴 월 장학금이 설치되었다. 레닌그라드 군기계연구소의 대학원생과 학생에게 각각 하나씩, 툴라 기계연구소의 대학원생과 학생에게 각각 둘씩, 코브로프 전문학교의 우수 학생에게 다섯 개가 지급되었다. 1954년 10월 17일 코브로프에는 조각가 마트베이 마니제르와 건축가 알렉산드르 벨리카노프의 기념비가 세워졌고, 그의 이름을 딴 무기공장 구내에는 흉상과 기념판이 설치되었다. 그가 살던 집은 1978년 1월 6일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코브로프에서는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유치원, 문화휴양공원, 금속노동자 문화회관, 옛 콤소몰스카야 거리가 그의 이름을 받았고, 하리코프와 노보시비르스크 등 옛 소련 여러 도시에도 데그탸료프 거리가 남았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