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러시아 1901–1990 ○ 자연사

세 번의 권력 공백기를 메운 임시 국가원수, 그로미코의 22년 1차관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카리브 위기 비밀협상 (1962–1963)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았을 때, 흐루쇼프가 미국과의 비공식 접촉 창구로 선택한 인물은 외무부 제1차관 쿠즈네초프였다. 그는 소련 대표로서 유엔에서 미국 측 협상가 존 매클로이와 수차례 독대했다. 매클로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개인적 신임을 받으며 백악관과 직통으로 연결된 인물이었다.

냉전 외교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이 순간에 쿠즈네초프는 기술적 전문성과 실무 감각으로 협상을 이끌었다. 카네기공대 유학 시절 익힌 영어와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에게 중요한 자산이었다. 미 국무부 사료에 따르면, 1963년 1월 2일부터 5일까지 쿠즈네초프는 매클로이와 함께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할 공동서한의 문구를 한 단어 한 단어 절충했다. 소련은 '합의(understanding)'라는 표현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합의의 정도(degree of understanding)'와 '진전의 범위(extent of progress)'라는 수식어를 요구했다. 나흘간의 줄다리기 끝에 양측은 절충안에 합의했고, 1월 7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공동서한을 제출함으로써 카리브 위기는 공식적으로 봉합되었다.

이 협상은 쿠즈네초프가 이후 20년 넘게 소련 외교의 실무를 책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조용하고 실무적인 스타일은 그로미코의 엄격한 체계 아래에서 미국 측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소련 협상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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