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당 지도자이자 주중 대사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8–1960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34–1940건설 기술직 후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 졸업, 군 건설현장 주임기사
- 1941–1946붉은군대 복무, 카렐리야 전선 참전, 주독 점령군 수송부서장
- 1948–1960레닌그라드에서 건설·소비에트·당 직책 역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까지 승진
- 1962–1970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CPSU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1962–1966)
- 1962–1971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70–1978주중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9–1982주네덜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관련 역사 사건
레닌그라드를 이끈 8년 (1962–1970)
톨스티코프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불린 1962년 5월, 이 도시는 아직 전쟁의 상흔을 지닌 채 흐루쇼프의 개혁 실험이 집중되던 곳이었다. 그는 8년간 이끌며 그 상흔을 도시 재건과 산업 고도화로 바꾸는 데 매달렸다. 그의 재임 중 레닌그라드는 1965년 코시긴 개혁, 곧 기업에 일정한 자율과 이윤 유인을 주는 신경제체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적용한 실험장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 개혁의 특징적 산물이 톨스티코프 재임기에 처음 등장한 과학생산연합(НПО)으로, 연구소와 생산공장을 한 기구로 묶어 연구 성과를 곧바로 생산에 연결하려 한 조직이었다. 레닌그라드는 전자·조선·정밀기계 등 기술집약 산업이 밀집한 도시였기에 이런 결합에 가장 유리했고, 이후 소련 전역으로 퍼진 과학생산연합의 본보기가 됐다.
같은 시기 그의 이름으로 추진된 것은 대규모 주택·산업 건설이었다. 전후 부족했던 주택을 대량 공급하는 패널 방식 공업화가 본격화됐고, 도시 외곽에 새 주거단지가 들어섰다. 문화·체육 시설도 이 시기에 마련됐다. 1967년 개관한 콘서트홀 옥탸브리스키와 스포츠 궁전 유빌레이니는 톨스티코프 재임기의 대표적 건축물로 꼽힌다. 도시의 경제·사회 기반을 넓힌 점은 동시대와 후대 모두 그의 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만 이 재건과 병행하여 반체제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제1서기로서 그는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등 레닌그라드 지식인들에 대한 검거와 재판을 방조하는 위치에 있었고, 정치범 재판이 열린 도시에서 당 권력의 얼굴이었다. 1970년 그가 갑작스레 주중 대사로 전출된 것은 이 오랜 재임과 그가 쌓은 독자적 권위를 브레즈네프가 불편하게 여긴 결과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한 도시를 개혁과 억압, 건설과 통제 사이에서 8년간 주관한 인물이라는 점이 그의 레닌그라드 시절의 본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