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아민 엠마누일로비치 딤시츠

Вениамин Эммануилович Дымшиц
소련 러시아 1910–1993 ○ 자연사

23년간 소련 부총리를 지낸 유대인 건설기술관료

1970년 3월 4일, 소련 유대인 기자회견의 주인공으로 나서 소련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유대인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부에서 23년간 부총리를 지낸 그에게 주어진 모순된 순간이었다.

소련 최장수 부총리 중 한 명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아조프스탈·자포로지스탈·인도 빌라이 제철소 등 전략적 공업 프로젝트의 건설을 지휘한 기술관료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부총리로 발탁된 후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경제 부총리로 남아 고스플란·최고국민경제회의·고스스나프를 차례로 이끌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공급 체계를 총괄했다. 스탈린상 2회 수상자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체제 내 기술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소련 정부 최고위 유대인: 생존과 모순

딤시츠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소련 정부에서 고위직을 차지한 유일한 유대인이었다. 그가 부총리와 고스플란 의장,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을 역임하는 동안, 소련의 대이스라엘·반시온주의 캠페인은 점점 격화되었고, 유대인으로서 정권의 핵심부에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 모순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딤시츠의 생존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48~1953년 스탈린의 반유대주의 캠페인 시기, 그는 자포로지스트로이 트레스트에서 "유대인들을 편애"하고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을 고용하여 볼셰비키 원칙을 위반했다"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유대계 관료들이 대거 숙청되는 와중에도 그는 자리를 지켰고, 1950년 중공업 건설 차관으로 중앙에 진출했다.

1970년 3월 4일, 딤시츠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유대인 소련 시민 기자회견'의 주인공으로 나서 소련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규탄했다. 이어 1971년 2월에는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적의 선전을 분쇄하고, 시온주의자들을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자 평화와 노동자 계급의 적으로 폭로할" 대책을 제안했다. 이는 유대인으로서 체제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증명해야 했던 한 기술관료의 비극적 순응이었다.

딤시츠는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체제에 완전히 동화된 기술 엘리트의 전형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제가 필요할 때 내세우는 '전시용 유대인'이었다. 1985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과 소비에트 권력 사이의 긴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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