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 선전기구의 설계자이자 당사(黨史) 편찬자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 1910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민스크 소비에트 서기, 『즈뱌즈다』 편집자
- 1920–1922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국 서기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7–1928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보선전부장
- 1932–1935역사-당 연구소(적색교수양성소) 소장
- 193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당 선전선동부 부장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벨라루스 공산당 중앙국 서기
- 1922.12소련의 결성1920-22년 벨라루스 공산당 서기로서 연방 가입 결정에 주도적 역할
- 1937–1938대숙청표적 · 코민테른 지도부 출신 역사가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이자 『소련 공산당 약사』의 저자. 1937년 6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11월 스탈린의 '전직 CC 위원 및 후보' 처형 명단에 기재되었다. 1938년 7월 28일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 날 새벽 퍄트니츠키, 운슐리흐트, 루주타크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매장지는 NKVD 사격장 '콤무나르카'. 1955년 11월 30일 복권.
당사(黨史) 편찬과 『단기강좌』의 전사
1931년 스탈린은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에 보낸 편지를 통해 당 역사가들의 지나친 스콜라주의를 질책하고, 레닌의 역할을 정당하게 부각하지 못하는 기존 당사 서술을 근본적으로 쇄신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개입으로 촉발된 새로운 당사 교과서 편찬 사업에서 크노린은 야로슬랍스키, 포스펠로프와 함께 핵심 집필진으로 지목되었다.
크노린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역사-당 연구소(적색교수양성소) 소장을 맡으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출간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요구한 대중적·동원적 서사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사방법론 사이에서 크노린을 비롯한 구세대 역사가들은 끝내 만족스러운 원고를 제출하지 못했다. 1937년 초, 대숙청이 본격화되자 스탈린은 2-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원들의 낮은 경계심이 당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개정 작업을 다시 독촉했다. 크노린은 야로슬랍스키, 포스펠로프와 함께 새로운 집필단에 편성되어 초·중급용 교과서 초안 작업에 착수했으나, 1937년 6월 22일 체포되면서 이 작업에서 배제되었다.
크노린이 체포된 후 야로슬랍스키와 포스펠로프는 수차례의 전면적 재집필을 거쳐 1938년 9월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를 완성했다. 이 교과서는 1956년까지 소련 전역에서 4천만 부 이상 발행되었으며, 스탈린 시대 정전(正典)의 중핵이 되었다. 크노린의 1935년 저작은 그 직접적 전신이었으나, 정작 저자 자신은 '인민의 적'으로 몰려 완성된 『단기강좌』에서 그 이름이 철저히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