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마니스의 총애를 받은 작가에서 라트비아 소비에트화의 설계자로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경력 연표
- 1933–1935리가 시립도서관 사서
- 1935–1940신문 『야우나카스 지냐스』 기자
- 1940.6–8라트비아 SSR 내무장관
- 1940–1959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52–196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54–1958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6라트비아 작가동맹 부의장·이사
관련 역사 사건
라트비아인 강제이주의 설계자
빌리스 라치스는 소비에트 라트비아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강제이주를 주도한 최고위 정치적 책임자였다. 첫 번째는 1941년 5~6월, 나치 독일의 침공 직전에 이루어졌다. 라치스는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반소비에트·범죄·사회적 위험 분자'와 그 가족을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하는 결정에 서명했다. 이때 약 2만 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라트비아를 떠났으며, 추방 대상에는 전직 경찰, 독립 라트비아 행정부 관리, 장교, 공인 등이 포함되었다.
두 번째이자 더 큰 규모의 이주는 1949년 3월 25일 '프리보이 작전'으로 알려진 전 발트 3국 동시 추방이었다. 소련 중앙의 결정으로 시작되었지만, 라치스는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실행 명령에 직접 서명했다. 이 작전으로 약 5만 명의 라트비아인, 즉 '쿨라크'(кулак, 부농)로 분류된 농민, 민족주의 저항세력 가족, 반체제 인사 등이 일주일 만에 강제 이주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어린이와 노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라치스는 이주 결정의 배후에서 사무적으로 행동했지만, 그 책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1940년 내무장관 시절 그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반동 분자와 인민의 적으로부터 내무기관을 숙청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라트비아 역사학계는 라치스를 스탈린 시대 국가폭력의 핵심 집행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그가 수많은 라트비아 가정의 파괴에 직접적 책임을 졌다고 본다. 그의 문학 작품과 정치 경력 사이의 이러한 간극은 오늘날까지도 라트비아에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