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리온 로미나제 비사리오노비치 (베소)

Виссарион Виссарионович Ломинадзе
소련 그루지야 1897–1935 ✕ 자살

광주 봉기의 코민테른 설계자, 스탈린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

1930년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설을 마치자 강당은 침묵—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로, 코민테른 시절 중국 혁명에 깊이 개입했다. 1927년 8·7 긴급회의를 주재해 천두슈를 경질하고 마오쩌둥정치국으로 끌어올렸으며, 광저우 봉기를 승인했다. 중국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근거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1930년 시르초프와 함께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를 결성했다가 좌천되었고, 1935년 체포 위협 속에 자살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시르초프-로미나제 사건: 스탈린 집단화에 맞선 첫 당기구 반대파

1930년 로미나제는 자캅카스 당 제1서기로 부임한 직후, 이 지역에 북캅카스·우크라이나 같은 급속 집단화를 감당할 '물질적 생산 기반'이 없다고 공개 비판했다. 같은 해 6~7월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는 강제 집단화의 속도와 농민에 대한 과도한 압력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이 무렵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시르초프, 콤소몰 이론가 라자리 샤츠킨, 얀 스텐 등과 접촉해 산업화와 집단화의 속도를 늦추고 당내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공통된 입장을 확인했다.

스탈린은 이를 '좌우 블록'으로 규정했고, 1930년 11월 4일 중앙위·중앙통제위 합동회의는 「시르초프, 로미나제, 샤츠킨 및 기타 동지들의 분파 활동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로미나제는 중앙위원에서 제명되고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다. 이 사건은 구 좌익반대파 출신이 아닌 현직 당기구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스탈린의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첫 사례로, 이후 류틴 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당내 저항의 선례가 되었다. 로미나제는 마그니토고르스크로 좌천된 뒤에도 1932년 샤츠킨, 스텐과 함께 새로운 반대 그룹을 결성했으나, 스텐이 그해 가을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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