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코민테른에 충실한 교조주의 노선을 들여와 중공 초기 지도부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그의 노선을 표적으로 삼았고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상징으로 제거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5–1929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 1931.1중공 중앙정치국원 선출
- 1931–1937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37–1938중공 장강국 서기
- 1949–1956중앙법제위원회 주임
- 1956–1974소련 망명, 반마오 선전 활동
관련 역사 사건
망명기의 반마오 논쟁 저술
1956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 직전 치료를 명목으로 모스크바로 떠난 왕밍은 결국 귀국하지 않았고, 중·소 분열이 본격화한 1960~70년대에 코민테른 출신 국제주의자의 입장에서 마오쩌둥과 중공을 격렬히 비판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 쿠데타'로 규정하고, 마오가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신 이른바 '마오쩌둥 사상'을 유일한 준거로 삼아 당과 인민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1971년 가을 집필한 「'문화대혁명'과 마오주의의 제국주의 협력 시도」에서 그는 마오의 반소 노선을 '민족주의적 형식에 반공주의적 내용'이라 부르며, 소련과의 결렬을 제국주의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분석했다. 이 글들은 1979년 모스크바의 프로그레스 출판사에서 『마오의 배반』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출간되었고, 흐루쇼프 이후 소련 측이 중·소 논쟁에서 활용할 수 있는 내부자 증언으로 기능했다. 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살아남고 문화대혁명의 탄압을 피해 1974년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중공 역사의 대안적 서사를 대표하는 망명 노인으로 남았다. 왕밍의 회고록과 저술은 중공 당사 연구에서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