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 스타디움을 채운 해빙기 시인의 빛과 그림자
「바비 야르」는 '바비 야르 위에는 아무 기념비도 서 있지 않다'로 시작해, 홀로코스트를 집단적 소련 시민의 희생으로만 말하던 국가 서사에 정면으로 균열을 냈다.
해빙기 대표 시인. 「바비 야르」(1961)로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깼다. 스타디움을 채운 낭독회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는 시구로 문학의 공적 사명을 천명했다.
경력 연표
- 1949〈소비에트 스포츠〉지에 첫 시 발표
- 1952첫 시집 『미래의 정찰병들』 출간, 최연소 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52–1957고리키 문학대학 수학, 두딘체프 옹호로 제적
- 1961「바비 야르」 발표 —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깨다
- 1962「스탈린의 후계자들」을 『프라우다』에 발표
- 1962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에 가사 제공, 초연
- 1968「프라하로 진격하는 탱크」 발표 후 공연 금지·해외여행 제한
- 1986–1991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89–1991하리코프 선거구 소련 인민대의원
- 1991–2017미국 털사대학 교수로 러시아·유럽 시와 영화사 강의
관련 역사 사건
쇼스타코비치와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
1961년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는 쇼스타코비치의 깊은 공감을 얻었다. 원래 단악장 성악-교향시로 구상되던 작업은 「유머」, 「상점에서」, 「공포」, 「출세」 등 네 편의 시를 추가해 5악장 합창 교향곡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4악장 「공포」는 쇼스타코비치의 요청으로 새로 쓴 시였다. 옙투셴코는 훗날 쇼스타코비치가 피아노로 전곡을 들려주었을 때의 충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음악을 쓸 수 있었다면 바로 그렇게 썼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시를 더 위대하고 의미심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국의 압력은 거셌다. 흐루쇼프는 초연 전 교향곡을 비판하며 공연 저지를 위협했고, 당초 지휘를 맡기로 했던 므라빈스키와 베이스 독창자 그미랴는 모두 사퇴했다. 이에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봉을 잡고 비탈리 그로마츠키가 독창을 맡았다. 1962년 12월 18일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 공연 당일 텔레비전 카메라는 시끄럽게 철거되었고, 합창단이 집단 퇴장하려 하자 옙투셴코가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정부 전용석은 비어 있었지만 객석은 만원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길고 긴 정적이 흐른 뒤 관객은 기립 박수와 "브라보!"로 터져 나왔다. 이후 1965년 칸타타 「스테판 라진의 처형」으로 두 사람의 협업은 이어졌으나, 교향곡 13번은 몇 차례 공연 후 소비에트 권역에서 사실상 금지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원본 악보를 서방으로 밀반출해 1970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오먼디의 지휘로 초연·녹음했다. 이 협업은 20세기 소비에트 예술사에서 문학과 음악이 결합해 권력의 검열에 맞선 가장 강렬한 사례 중 하나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