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베리아 석유단지와 체르노빌 석관을 건설한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건설 총책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경력 연표
- 1950–1965바시키르 석탄·석유 건설 트러스트에서 작업반장에서 트러스트 관리자로 승진
- 1965–1970튜멘석유가스건설총국 주임기사 겸 제1부국장
- 1970–1983석유·가스산업건설 차관, 후에 제1차관
- 1983–1985소련 국가노동·사회문제위원회 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겸임)
관련 역사 사건
고스스트로이 개혁과 건설정책 (1985–1989)
바탈린이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고스스트로이는 주로 규범 제정과 설계 조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바탈린은 이를 건설부처 전체를 총괄하는 작전사령부로 탈바꿈시켰다.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하면서 확보한 지위를 활용해, 산하에 세 개의 신규 총국을 신설하고 실무 경험이 풍부한 현장 출신 간부들로 지도부를 교체했다. 그의 측근들은 대부분 야말의 세베르가스스트로이(Севергазстрой) 트러스트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훗날 '바탈린 참모부'로 불렸다. 고스스트로이는 이제 국가경제계획에 포함된 모든 대규모 건설사업을 직접 통제하게 되었다.
바탈린은 건설 부문에서 실험적인 경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건설 트러스트와 발주처 간의 관계에 상품-화폐 관계를 도입하고, 최초의 건설 협동조합을 허용했으며, 특정 지역과 기업에서 대규모 경제 실험을 전개했다. 회의에서는 계획과 의도가 아닌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 그가 정착시킨 규율이었다. 1986년에는 2000년까지 모든 소비에트 가구에 개별 주택을 공급한다는 '주택-2000' 프로그램이 승인되었고, 바탈린은 고르바초프에게 한 5개년 계획 기간에 6억 제곱미터 이상의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목표의 핵심 근거로 그는 당시 적극적으로 개발을 추진하던 경량기포콘크리트(ячеистый бетон) 벽체 재료 생산을 내세웠다. 또한 모놀리트(현장타설 콘크리트) 주택건설 방식의 도입, 시멘트와 벽돌 생산량 증대, 비국가 혁신 기금의 유치도 병행 추진했다.
그러나 바탈린의 개혁은 저항에 부딪혔다. 건축가 연합은 건설업자의 '기술 독재'가 건축의 표현성을 억압한다고 비판했고,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 및 관련 부처들과의 관할권 충돌도 빈번했다. 특히 그가 고스플란 의장 유리 마슬류코프와 사전 협의 없이 고르바초프의 플레넘 연설에 포함시킨 6억 제곱미터라는 수치는 심각한 마찰을 일으켰다. 1989년 6월, 그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거친 업무 스타일과 독단성을 이유로 당내 관료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결국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퇴진은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이 당내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 간의 충돌 속에서 좌초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