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의 길을 연 「젊은 원수」
1936년 12월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냈고, 그 대가로 반세기 넘게 연금 생활을 했다.
만주 군벌 장쭤린의 아들로 1928년 아버지가 일본군에 폭살되자 동북을 물려받았고, 그해 말 난징 국민정부에 귀순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근거지를 잃은 뒤 공산당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1936년 12월 시안에서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를 감금해 내전 중지와 항일을 요구했다. 사건은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풀렸지만 그는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돌아가 이후 반세기 넘게 연금되었다. 1990년대 풀려나 하와이에서 100세로 사망했다.
다른 이름: 장학량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8아버지 사후 봉천군·동북군 지휘권 승계
- 1928–1931동북 변방군 사령관
- 1928–1936동북군 사령관,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
- 1930중원대전에서 장제스를 지원
- 1936시안 사건에서 장제스를 구금해 항일 합작 요구
- 1936–1990장제스를 따라 난징으로 간 뒤 장기 연금
- 1936.12시안 사변 주도
관련 역사 사건
동북군과 공산당의 비밀 협력, 1935~1936년
1935년 장쉐량은 시안에 주둔한 동북군을 이끌며 국민정부의 공산당 토벌 지휘를 맡았다. 동북군은 홍군과의 교전에서 연이어 패했고, 포로로 잡혔다가 정치 교육을 받고 돌아온 병사들은 공산당이 항일 공동전선을 제안한다고 전했다. 일본에 점령된 만주를 되찾기를 바라던 장쉐량은 장제스의 불저항 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공산당과의 전투보다 일본에 맞서기를 원했다. 1936년 초 공산당 측 리커눙과 접촉한 뒤 장쉐량은 내전에서 소극적 태도를 취하기로 했으며, 4월 9일 저우언라이가 시안에서 비밀 휴전 합의를 구체화하고 홍군에 보급품을 확보했다. 장쉐량은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가 항일전선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산당의 장제스 타도 제안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9월 22일 양측은 정식 동맹을 맺었다. 이 협력은 장쉐량이 중앙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동북군을 공산당과의 전쟁에 동원하지 않도록 했으며, 그해 12월 시안사변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