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린

张作霖
북양정부·군벌 중국 중국인 1875–1928 ✕ 암살

만주를 지배한 군벌 정치가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돌아오던 그의 열차가 황고둔에서 폭발했다.

장쭤린은 청 말의 군인에서 출발해 중국 군벌시대 동북 지역의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한 중국 정치가였다. 그는 봉천군벌을 이끌며 만주를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했고, 군사력과 산업·재정 정비를 결합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일본의 지원과 만주 이권을 둘러싼 협력은 그의 권력을 키웠지만, 동시에 일본군과 충돌할 여지도 남겼다. 국민당의 북벌로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중 관동군 장교들이 설치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이 황고둔 사건은 일본군의 독단적 만주 개입이 심화되는 전조가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베이징 장악과 반공 노선, 1926-1928

1926년 4월 봉계가 베이징을 장악하고 그해 12월 장쭤린이 안국군 총사령에 오르면서, 그의 권력은 만주를 넘어 북중국으로 확장됐다. 1927년 6월 16일 여러 군벌의 추대로 대원수 후보로 지명된 그는 이틀 뒤인 6월 18일 중난하이 화이런탕에서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에 취임해 대총통 권한을 행사했고, 베이양 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가 됐다.

이 시기 그는 국민당·공산당과의 대결을 공공연한 반공 노선으로 밀어붙였다. 펑위샹과 장제스를 '야심 많고 교활한 도적'으로 규정한 그는 소련과 코민테른이 국공합작을 이용해 중국을 '적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1927년 4월 6일 군경 300여 명이 둥자오민샹 공사관구로 들어가 소련 대사관에 인접한 원동은행과 중동철도 사무소, 경자배상위원회 건물을 수색했다. 대사관 본관은 포위만 됐고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소련 외교·상무 인원이 체포되고 문서가 대량으로 압수됐다. 이곳에 피신해 있던 베이징대학 도서관장 출신의 중국 공산당 창립자 리다자오와 국민당 좌파 인사들도 함께 체포됐다.

4월 28일 군사재판은 리다자오 등 2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날 교수형이 집행됐다. 장쭤린은 포고에서 이들이 적당으로서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치안을 어지럽히며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 수색으로 소련은 항의하고 대사관 인원을 소환했으며, 치외법권이 적용되던 공사관구를 군경이 강제로 수색한 데 대해 각국 사절단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베이징 정부의 국제적 입지도 흔들렸다. 압수 문서는 소련의 전복 공작을 입증하는 자료라며 공표됐다. 이 처형은 베이징에서 국공합작이 사실상 끝나는 계기가 됐다.

반공 노선은 만주 문제와도 얽혀 있었다. 그는 소련의 만주 침투를 경계하면서도 동방철도 문제에서는 정면 대결을 피했고, 소련은 1924년 이후 이 철도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확립했다. 1927년 2월에는 장강에서 소련 상선 '빠먀찌 레니나'호를 나포해 선원과 외교 전서를 체포했고, 같은 해 4월 9일에는 프랑스 당국의 허락을 받아 톈진 조계의 소련 기관들을 수색했다. 그해 12월 난징 국민정부가 소련과 단교를 선언한 것도 이런 대결 구도 속에서 나왔다. 북벌군의 압박이 커지자 1928년 5월 9일 그는 남북이 힘을 합쳐 외세에 맞서자고 호소했고, 6월 2일 하야를 선언하며 중앙 정무를 국무원에, 군사는 각 군단장에게 넘겼다. 그리고 사흘 뒤 황고둔에서 폭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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