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세운 원로로, 1914년 「신성 연합」 정부에 입각한 사회주의자
1914년 전쟁 발발 뒤 게드는 사회주의자의 반전 노선에서 이탈해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들어갔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는 사회주의 투쟁 외의 별도 반전 행동을 거부했지만, 전쟁기 정부 참여는 그 선택을 현실 정치로 옮겼다.
파리코뮌을 지지했다가 망명한 언론인으로, 1880년 마르크스와 함께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하며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대표가 되었다. 개혁주의자 조레스와 오랫동안 맞섰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 창당에 참여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전쟁을 없앨 것이라며 특별한 반전 행동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1914년 8월 조국이 위협받는다고 보고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해 1916년까지 「신성 연합」 정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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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카를 마르크스와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했다. 강령은 그해 11월 당 창립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 1907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프랑스 소수파를 대표해 사회주의 투쟁 외의 특별한 반전 조치를 거부하는 결의안을 냈다.
- 1914–1916전쟁 발발 뒤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참여해 1916년까지 재임했다.
노동자 국제 연대와 반전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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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 1902프랑스 사회당 창당 및 지도
- 1904《뤼마니테》 창간
- 1905SFIO 출범 —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 통합 주도
- 1900–1903《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저술
- 1914반전 총파업 운동 전개 중 암살당함
1914년 신성 연합 정부에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들어간 프랑스 사회당 의원
센에우아즈의 보니에르쉬르센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가 되어 변호사로 일했고, 언론인으로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를 이끌었다. 블랑키주의 경향의 중앙혁명위원회에 들어가 그 후신 정당들을 거쳐 1905년 SFIO에 합류했다. 1893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 18구의 노동자 지역에서 사회주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1년 평화주의 소책자 『왕을 세우라, 아니면 평화를 맺으라』를 썼지만, 1914년 8월 비비아니의 신성 연합 정부에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들어가 브리앙 내각에서 1916년 12월까지 자리를 지켰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에 반대표를 던졌다. 1922년 샤모니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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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1897《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인
- 1893센 도 하원의원 당선
- 1905SFIO 합류
- 1914–1916공공사업부 장관(신성 연합 정부)
- 1920투르 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 반대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남긴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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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 1914–1919전시 사회당 각료 비서실장, 종전 후 하원의원 당선
- 1920.12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낡은 집」 사수 연설
- 1921–1936SFIO 재건, 『르 포퓔레르』 주필, 원내 지도자
- 1936.02왕당파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에게 폭행당해 중상
- 1936.06–1937.06인민전선 정부 총리, 마티뇽 협정·유급휴가·주 40시간제
- 1938.03–04제2차 블룸 내각, 상원의 벽에 다시 막혀 한 달 만에 붕괴
- 1940.07비시에서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표를 던진 80인 중 한 명
- 1942–1945리옴 재판에서 인민전선을 변호, 이후 부헨발트 인근 특별수용소 억류
- 1946.12–1947.01과도정부 총리, 전후 재건과 미국 차관 교섭(블룸-번스 협정)
- 1950.03주이앙조자스에서 사망
투르 대회의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가 1923년 떠난 정치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 초대 서기장이 되었으나, 1923년 탈당했다. 이후 장관을 지냈고 1940년 페탱 내각에서 정전협정에 참여하고 전후 부역 혐의로 재판받아 무죄가 되었다.
벨포르 지방 출신의 교사로 SFIO에 들어가 1918년 당 사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카섕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 뒤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했고, 새로 선 프랑스 공산당의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규율 요구와 충돌해 1923년 1월 당을 떠나 SFIO로 돌아갔다. 1930년대 여러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고, 1940년 6~7월 페탱의 첫 내각에 들어갔으나 비시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후 부역 혐의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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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20SFIO 사무총장
- 1921–1923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 1923공산당을 떠나 공산주의 통일당(PCU)을 창당
- 1928–1936마르티니크와 오트손의 사회주의 의원
- 1935–1940여러 정부에서 장관 역임
- 1940페탱 내각의 공공사업장관, 7월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데 찬성표
극우 언론의 중상에 목숨으로 답한 인민전선의 내무장관
죽기 직전 블룸에게 남긴 유서: "그들이 나를 망신시킬 수 없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의 책임은 지게 될 것이다. 나는 탈영병도, 배신자도 아니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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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 1925–1936릴 시장
-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 1936.11.17릴 자택에서 자살, 장례에 수십만 추모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쓴 사회당 좌파, 인민전선의 왼쪽 경계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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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1914센에마른의 교사 집안,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됨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전쟁이 그를 반군국주의자로 만듦
- 1924–1935SFIO 파리 연맹과 교원노조 운동
- 1935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 결성
- 1936.05「모든 것이 가능하다」 기고
- 1936–1937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 책임
- 1938제명 뒤 노동자농민사회당(PSOP) 창당
- 1940–1946멕시코 망명
- 1946–1958SFIO 복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서 활동
- 1958.06파리에서 사망
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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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