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노프는 소부르주아지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레닌, 1917년 9월 1일
본명 니콜라이 기메르. 1917년 2월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이 되었으며, 멘셰비키-국제주의자로서 전쟁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연합을 주장했다. 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은 1917년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한 역사적 회의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아파트에서 열렸다.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거짓 혐의로 총살,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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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사회혁명당(SR) 입당; 1904년 체포, 타간카 감옥 수감; 1905년 10월 석방 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
1911–1913아르한겔스크주로 3년 유형; 농업 통계 자료 정리
1914–1917잡지 『소브레멘니크』『레토피시』 편집자; 반전 국제주의자;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 『이즈베스티야』 창간 주도
1917–1918멘셰비키-국제주의자; 『노바야 지즈니』 편집자; VTsIK 2·3·4기 구성원; 1918년 6월 제명
1919–1923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Записки о революции) 집필·출간
1920–1929멘셰비키당 탈퇴; 대외무역 기관·농업경제연구소 근무; 공산주의 아카데미 회원; 1928년 강제 집단화 반대 연설
레비네는 1919년 4월 13일 뮌헨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어 붉은 군대 편성과 자본주의 극복을 내걸었고, 공화국이 진압된 뒤 6월 처형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독일로 이주했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러 돌아가 투옥되었다. 독일에서 USPD와 스파르타쿠스단에서 활동했고, 1919년 KPD의 파견으로 뮌헨에 갔다. 4월 13일 KPD가 톨러의 평의회 정부를 대신하자 그 지도자가 되어 붉은 군대를 조직하고 공장을 노동자 관리에 넘겼다. 5월 뮌헨이 함락된 뒤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월 5일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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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에 참가했다가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1918–1919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 창설에 참여하고 독일공산당(KPD)에서 활동했다.
1919KPD의 파견으로 뮌헨에 가 지역 조직을 정비하고 평의회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관여했다. 4월 13일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화국을 이끌었다.
1919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6월 5일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 출신으로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접고 아인슈타인·플랑크 아래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1차대전을 겪으며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라 통일전선을 배격하며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였으나, 스탈린과 텔만에게 밀려나 1926년 제명된 뒤로는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길을 헤맨 이단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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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