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카다르와 함께 소련 개입을 지지하고 혁명 진압 뒤 총리가 된 헝가리 공산주의자
세레겔리에시의 독일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 포로가 되어 톰스크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해 국제 포로 부대를 이끌었고, 1918년 귀국해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다. 1922~1936년 소련에서 살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오토 플라터라는 이름으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전후 부다페스트 경찰청장과 외교관을 지냈다. 1956년 혁명 중 너지 정부의 내무장관이었으나 11월 카다르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소련 무력 개입을 지지했고, 카다르 정부의 군·공안 장관으로 무장 경찰과 노동자 민병대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8~1961년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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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러시아군 포로, 톰스크 수용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당 참여
- 1919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 군사 인민위원
- 1936–1939스페인 내전 제11국제여단장
- 1946–1949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너지 정부 내무장관, 카다르 정부 군·공안 장관
- 1958–1961헝가리 총리
헝가리 스탈린화의 설계자, '살라미 전술'로 일당독재를 구축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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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통상 인민위원, 적위대·적군 지휘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25–1940호르티 정권 아래 투옥 (8.5년형 이후 종신형, 1940년 석방)
- 1940–1945모스크바에서 헝가리 공산당 해외국 지도
- 1945–1948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1956헝가리 노동인민당(MDP)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년까지 서기장)
- 1952–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71소련 강제 망명 (키르기스스탄, 아르자마스, 고리키)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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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19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19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19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비밀 재판 후 처형
- 1989영웅광장 재매장
라코시 시대 문화정책의 총감독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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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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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19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19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19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19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19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19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19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라코시 4인 지도부의 국방장관
1953년 헝가리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소련의 비판을 받고 새 정치위원회에서 밀려났으며,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1961년까지 수감되었다.
아버커우이산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소련에 머물다 1944년 말 귀국해 1945년부터 헝가리 공산당 정치국·서기국원이 되었다. 1948~53년 국방장관으로 라코시·게뢰·레버이와 함께 「4인」 지도부를 이루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부르지 않았고, 불가닌은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군사령관처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새 정치위원회에서 빠진 뒤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61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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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서기국원이 되었다.
- 1948–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국방장관을 지냈다.
- 1956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61석방된 뒤 부다페스트에서 편집자·출판인으로 일했다.
헝가리 비밀경찰의 창설자이자 그 희생자
1945년 정치경찰 책임자가 된 가보르 페테르는 ÁVO·ÁVH를 이끌며 쇼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1953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우이페헤르토의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정치경찰 책임자가 되었고, 1945~52년 국가보안기관(ÁVO·ÁVH)의 수장으로 러이크 재판을 비롯한 숙청과 고문을 지휘했다. 1953년 초 라코시는 소련의 「반시온주의」 숙청을 본떠 그를 체포했다. 1953년 6월 베리야는 그의 사건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1954년 군사법정에서 시온주의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9년 개별 사면으로 풀려나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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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후반노동운동에 참여하고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31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43공산주의 평화당 지도부에 참여했다.
- 1945부다페스트 헝가리 국가경찰 정치보안부 책임자가 되었다.
- 1945–1952ÁVO·ÁVH 비밀경찰 조직을 이끌며 쇼 재판 준비와 진행에 핵심 역할을 했다.
- 1952직위에서 해임되고 헝가리 노동자당에서 제명되었다.
- 19531월 3일 체포되었다.
- 1954군사최고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1957형기가 14년으로 감형되었다.
- 1959개별 사면으로 석방되어 은퇴할 때까지 사서로 일했다.
내무장관으로 비밀경찰 ÁVH를 창설했으나 라코시의 첫 희생양이 된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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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 1937–19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 1941–1944헝가리 귀환 후 지하 저항운동, 당 중앙위원회 서기, 헝가리 전선 공동 지도
- 1946.03–1948.08내무장관 — ÁVH(국가보안국) 창설, 초기 쇼재판·숙청 지휘
- 1948.08–1949.05외무장관
- 1949.09–10티토주의 간첩 혐의 쇼재판, 사형 선고 및 집행
- 1956복권 및 10월 6일 국장 재매장, 10만 인파 운집 →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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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PV) 및 공산청년동맹 입당, 지하활동
- 1933–1934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형교도소에서 라코시와 마주침
- 1942–1944KPV 중앙위원·서기, 반파시스트 '헝가리 전선' 창설 주도
- 1948–1950내무장관 — 러이크 라슬로 체포 관여, 이후 당 조직부장으로 좌천
- 1951–1954'티토주의자'로 체포, 무기징역 → 1954년 7월 석방
- 1956.10–11너지 내각 장관 → 소련과 협상, 새 정부 수립
- 1956–1988MSZMP 서기장 ― 32년간 헝가리 실질적 국가원수
- 1956–1958총리 겸임
- 1961–1965총리 겸임 — 경제개혁·대사면, '구야시 코뮤니즘' 확립
1956년의 장군이자 논쟁적 증언자
“나는 5년의 투옥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나왔다.”
키라이 벨러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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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루도비카 사관학교 졸업, 육군 소위
- 1942–1945헝가리군 참모장교, 동부전선 복무
- 1949–1951헝가리 인민군 보병사령관, 소장
- 1951–1956정치재판으로 수감,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
- 1956국민위병 총사령관, 부다페스트 군사령관
- 1957–1966미국 망명,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취득
- 1964–1982브루클린 칼리지 군사사 교수
- 1990헝가리 국회의원
개혁 공산주의 언론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숀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너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너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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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1936학생 잡지 「토바브」 편집
- 1939–1941헝가리 공산당 가입 및 네프서바 기자
- 1945–1949「서버드 네프」 국내정치부장
- 1949–1951레버이 요제프 문화교육부 차관급 보좌관
- 1951–1954정치 재판으로 수감
- 1954–1956「머저르 넴제트」 기자, 페퇴피 서클 조직자
- 1956.10–11너지 임레 제2·제3 정부 국가장관
- 1957너지 임레 재판 피고 예정, 수감 중 단식 사망
협상과 무장 저항 사이에 선 군인
“가야 합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나라가 제 도움을 요구합니다.”
말레테르 팔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이자 반나치 투쟁을 거친 헝가리 장교로, 전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6년 혁명에서 그는 킬리안 병영에 파견된 뒤 저항 세력과 휴전하고 병영 방어에 합류했으며, 군인과 시민 무장세력 사이의 조정에 관여했다. 너지 임레 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그는 소련군과 철수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958년 너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989년 그는 복권되어 혁명의 순교자로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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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군 입대
- 1940루도비카 사관학교 생도
- 1944–1945소련군 포로, 반독일 유격대원
- 1945임시정부 경비대대 지휘관, 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56.10대령, 킬리안 병영 방어 지휘
- 1956.11너지 임레 정부 국방장관, 소장
- 1956.11.03퇴역 협상 대표, 퇴켈에서 체포
- 1958처형
- 1989복권, 추서 및 재매장
- 1956.10.23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파견된 기갑부대 지휘
- 1956.10.25킬리안 병영 구원을 위해 전차부대 지휘
- 1956.10.29–31무장세력과 휴전·협상, 국민위병 조직 논의 참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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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불법 헝가리 공산당 가입
- 1945–1947MADISZ 전국 서기
- 1951–1953농업 관련 장관
- 1953–1955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6헝가리 각료회의 의장
- 1956혁명 중 소련군 개입 요청서 서명
- 1963–1968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사회학 연구그룹 창립·소장
- 197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제명
국가의 명령과 민중을 향한 총부리 사이에서 멈춘 경찰 수장
1956년 10월 23일, 그는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코파치 샨도르는 금속 노동자와 반나치 저항 활동가 출신의 헝가리 경찰 지휘관으로, 국가기구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부다페스트 경찰청장으로서 1956년 10월 23일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봉기 세력과 협력하며 국가근위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너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훗날 회고록으로 혁명의 내부 경험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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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모칸 반나치 저항운동 참가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경찰관이 됨
- 1949내무부 수용소 업무 담당 국장
- 1952–1956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국가근위대 부사령관
- 1958너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 1963사면으로 석방
- 1975–2001캐나다 망명과 회고록 집필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동요한 공산당 말기의 과도기적 서기장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혼돈, 그리고 — 환상은 버려야 한다 — 백색 테러가 만연할 것이다」(1988.11.29)
미슈콜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입당한 후 선전선동 부문을 거쳐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88년 5월 카다르의 후임으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서기장에 올랐다. '모델 변경'(modellváltás)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으나, 1988년 11월 '백색 테러'를 경고한 연설은 그가 체제 전환의 속도를 전혀 읽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듬해 네메트 미클로시 등 급진 개혁파에 밀려났고, 당이 사회당으로 재편된 후 강경파를 이끌었으나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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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14세)
- 1954–1956Borsod-Abaúj-Zemplén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1974–1979MSZMP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84–1987부다페스트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1989MSZMP 정치국 위원
- 1987.06–1988.11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88.05–1989.10MSZMP 서기장, 카다르 후임
- 1989.12–1990재창당된 MSZMP 대행 의장, 총선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