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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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하고 군산복합체를 경고한 5성 장군 대통령
이런 종류의 일에 뛰어들 때는 단 하나만 명심해야 하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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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웨스트포인트 졸업
- 1942–1945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
- 1945미국 점령 독일 군정장관
- 1945–1948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48–1953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1951–1952NATO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53–1961제34대 미국 대통령
비밀전쟁을 제도화한 미국 정보 관료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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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26미 국무부 외교관, 유럽·근동 담당
- 1927–1944외교·군축 협상 법률고문, 외교협회 간사·회장
- 1942–1945OSS 베른 지국장, 작전 선라이즈 협상 담당
- 1945OSS 베를린 지국장
- 1951–1953CIA 계획 담당 부국장, 중앙정보국 부국장
- 1953–1961중앙정보국장
- 1963–1964케네디 암살 진상조사 워런위원회 위원
핵폐기를 진심으로 믿었으나 SDI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냉전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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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일리노이주 탬피코의 아일랜드계 가정에서 출생
- 1937–1964할리우드 배우, 영화 53편 출연, 영화배우조합 회장 역임
- 1967–1975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학 시위 진압과 복지 개혁 추진
- 1981–1989제40대 대통령, 레이거노믹스·군비 증강·'악의 제국' 연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으나 SDI로 결렬
- 1987.06브란덴부르크문 앞 '이 벽을 허무시오' 연설
- 1987.12INF 조약 서명,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
- 1994–2004알츠하이머병 진단,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데탕트로 소련과 핵무기 제한의 틀을 열고 워터게이트로 무너진 유일한 사임 대통령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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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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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