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 터널에서 그가 지휘한 장갑차 행렬과 시위대의 충돌로 세 명이 사망했다.
세르게이 수로비킨은 소련 말기 장교로 출발해 러시아군 최고위 지휘관으로 올라선 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타만 사단 BMP 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터널에 진입했으며, 충돌로 시위대 세 명이 사망한 뒤 구금됐지만 상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기소가 취하됐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체첸, 시리아에서 지휘했고,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적 성과와 민간인 피해를 함께 낳은 강경한 작전 방식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국가의 명령 체계가 해체 뒤 러시아의 군사국가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한 경로를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1987옴스크 고등 제병지휘학교 졸업, 타만 근위 자동차화소총사단 소대·중대 지휘관
1989–1991아프가니스탄 복무, 타만 사단 제1자동차화소총대대장
19918월 쿠데타 때 모스크바 투입 BMP 대대 지휘, 터널 충돌 뒤 구금 및 기소 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