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베사라비아 쿠볼타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를 마치고 유리예프 대학에 들어갔으나 사회혁명당원이라 1905년 혁명 뒤 학업을 그만두었고, 잡지에 「깨어나라, 루마니아인이여!」를 실었다가 수배되어 이아시로 피해 1908~1912년 이아시 대학에서 공부했다. 1913년 신문 「몰도바의 말」을 펴내 합병을 주장했고, 1917년 몰도바 민족당 창당에 참여했다. 스파툴 처리이 부의장을 거쳐 의장이 되었다. 합병 뒤 베사라비아 담당 장관 등을 지내고 국민농민당에 들어갔으며, 1924년에는 루마니아 정부가 베사라비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1950년 체포되어 소련에서 25년 강제노동형을 받았고 1957년까지 갇혀 있다가 1979년 숨졌다.
스파툴 처리이 의장으로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을 이끌고 루마니아 합병을 성사시킨 베사라비아 정치가
1884년 베사라비아 러제니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마치고 기상 관측소 물리학자로 일했다. 2월 혁명 뒤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이 되었고, 케렌스키가 그를 러시아 임시정부의 베사라비아 대표로 보냈다. 처음에는 베사라비아가 러시아에 남아야 한다고 했으나, 스파툴 처리이 의장이자 몰다비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서 1918년 4월 루마니아와의 합병 결의를 이끌었다. 합병 뒤 베사라비아 담당 국무장관이 되었고, 1923년 자기 계파를 이끌고 국민자유당에 들어가 보건·내무·통신 장관과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40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1884년 베사라비아 터너타리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문학부를 마치고 교사로 일했다. 사회혁명당원으로 1917년 케렌스키의 권유를 받아 인쿨레츠와 함께 베사라비아에 돌아왔고, 현 농민 소비에트 의장과 러시아 제헌의회 의원으로 뽑혔다. 1917년 12월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의 첫 정부인 총국장 위원회 의장 겸 농업 총국장이 되어 토지개혁을 앞세웠다. 공화국 이름을 다수 민족의 이름으로 짓자는 그의 주장이 이겼고, 루마니아군 도입 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지주들이 군대로 토지개혁을 막을까 염려해 주둔에 항의하기도 했다. 합병에 찬성했지만 친러시아적이라는 비난 속에 물러났고, 뒤에 루마니아 상원의원을 지냈다. 1940년 부쿠레슈티로 피해 1971년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