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와 파리 강화회의 때 프랑스 총리로 헝가리에 가혹한 조건을 밀어붙인 급진파 정치가
방데 출신의 의사이자 언론인으로, 1870년 파리 18구 구청장이 되었고 이듬해 파리 코뮌과 정부 사이의 타협을 시도했다. 독립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1906년 내무장관으로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06~1909년과 1917~1920년 총리를 지냈다. 1917년 11월 전쟁이 가장 어려울 때 총리가 되어 독일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요구했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 냈다. 헝가리를 독일처럼 약화시키려 해 트리아농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낳았다. 1929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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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0파리 18구 구청장
- 1906내무장관
- 1906–1909프랑스 총리
- 1917–1920프랑스 총리
- 1919파리 강화회의 의장
패배 앞에서 항전을 주장한 공화국 정치가
1940년 6월, 그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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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파리 변호사단 변론대회 제1서기
- 1919–1924하원의원,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1928–1940하원의원, 파리
- 1930재무장관
- 1931–1932식민지 장관
- 1938법무장관
- 1938–1940재무장관
- 1940국무회의 의장, 외무·국방장관 겸임
- 1946–1962국회의원
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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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40국방장관, 1938년부터는 총리 겸임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0–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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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폴랑 시장
-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디엔비엔푸 패전 뒤 넉 달 안의 휴전을 약속하고 총리가 되어 1954년 제네바 협정을 맺은 프랑스 정치가
1954년 총리가 된 피에르 망데스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네바에서 베트민과 직접 협상해 7월 휴전 협정을 맺고, 튀니지 자치 협상도 시작했다.
급진당 소속의 유대계 변호사·경제 전문가로, 전쟁 중 자유 프랑스에 가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찍부터 비판했고, 디엔비엔푸 함락 뒤인 1954년 6월 17일 넉 달 안에 휴전을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고 총리가 되었다. 7월 21일 제네바 협정으로 약속을 지켰다. 여덟 달 재임하는 동안 튀니지 자치를 인정했고, 그해 11월 알제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과 프랑스 핵 개발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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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급진당 소속으로 유르주 로비에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 1938레옹 블룸 내각에서 재무차관을 지냈다.
- 1943–1945자유 프랑스에서 재정위원, 이어 국민경제장관을 맡았고, 긴축 정책을 둘러싸고 드골과 대립해 1945년 4월 사임했다.
- 1954–1955총리로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을 협상하고 튀니지 자치 협상을 열었다. 유럽방위공동체 구상에 반대했으며 1955년 2월 내각 불신임으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