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동독 정부의 전신을 이끌고 경제 정책을 맡은 공산주의자
슈투트가르트 근교 포이어바흐에서 태어나 보슈 공장의 금속 프레스공으로 일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1920년대 공산당 농업 정책을 이끌었다. 나치 집권 뒤 투옥되었다가 소련으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프랑스에서 억류되어 1942년 게슈타포에 넘겨졌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3월 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화폐개혁과 경제계획을 이끌었다. 동독 정치국원과 부총리,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3년 7월 정치국에서 울브리히트 교체를 권했으나 자리를 지켰다. 기계공업장관과 대외무역장관을 지내다 196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독일 공산당 입당
- 1923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37–1938제11국제여단 지휘
- 1943–1945마우트하우젠 수용소
- 1948–1949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
- 1950–1961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부총리
- 1955–1961대외무역·독일내무역 장관
1953년 6월 16일 정부 청사 앞에서 파업 노동자들 앞에 나섰던 동독 중공업 장관
헤센 라우터바흐의 구리 세공인 아들로 열일곱에 광부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나가 1918년 병사평의회에 들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1922년 공산당에 들어가 작센 지구당 정치 책임자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감옥과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등 강제수용소에서 나치 시대를 버텼다. 전후 작센 경제·계획장관을 거쳐 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독에서 공업장관과 중공업장관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각료의 집 앞 군중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연설했으나 야유에 묻혔다. 1958년 울브리히트에게 「일탈적 태도」로 몰려 직책에서 밀려난 뒤 작가로 살았고, 197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독일 공산당 입당
- 1932–1933제국의회 의원
- 1933–1945투옥,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8–1949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9–1955공업장관, 중공업장관
- 1958「일탈적 태도」로 직책에서 밀려남
독일경제위원회의 계획 책임자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이 된 동독 경제 계획가
베를린 릭스도르프의 구두장이 아들로 사무원으로 일하며 야간에 경제학을 배웠고, 1931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신문과 당 군사정보 조직에서 일하다 1936년 체포되어 6년형을 살았고, 작센하우젠과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전후 공산당 경제부를 세워 이끌었고, 1947년부터 독일경제위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하며 계획을 맡아 1948년 반년 계획과 1949~1950년 2개년 계획을 짰다. 1952~1961년 라우의 뒤를 이어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8년 정치국원, 1955~1965년 각료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961년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상호경제원조회의 상임대표를 맡았고, 196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1독일 공산당 입당
- 1936–1945투옥, 작센하우젠·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 1947–1949독일경제위원회 계획 책임자
- 1952–1961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58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 1962상호경제원조회의 상임대표
동독의 파산을 경고했으나 체제를 구하지는 못한 국가계획위원장
내가 정치국에서 호네커에게 이 정책을 경고했을 때 나는 '사보타주'로 일축됐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36–1939기계공 훈련
- 1939–1945루프트바페 복무, 비행 교관
- 1948SED 입당
- 1955–1958모스크바 공산당 고등학교 수학
- 1960–1962SED 중앙위 계획·재정·기술부장
- 1962–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1965년 위원장 승진
- 1965–1989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겸 각료회의 간부위원
- 1973–1989SED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11월 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