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
정치적 입장(선택됨)
국적(선택됨)
출신 배경
시대

에마뉘엘 시에예스

Emmanuel Joseph Sieyès

제3신분의 국민 주권을 이론화한 성직자·정치가

1788~1789년 삼부회 소집을 둘러싸고 제3신분을 국민 전체와 등치시켰고, 이후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끝냈다.

성직자이자 정치사상가로 1789년 팸플릿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제3신분을 국민과 결부했다. 국민의회 성립에 기여했고 국민공회에서는 평원파에 속했다. 총재정부 말기에는 브뤼메르 쿠데타에 참여해 통령정부 수립을 도왔다.

상세 이력 보기
  • 1775–1788트레기에 주교 비서와 대리, 샤르트르 교구장대리로 재직했고 브르타뉴 삼부회 의원으로 특권 신분의 횡포를 목격했다.
  • 1789「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펴냈고 제3신분 대의원으로 국민의회 성립을 추진해 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 1792–1795국민공회 의원으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했고 총재정부 말기에 헤이그에 파견되어 대사 자격으로 활동했다.
  • 17995월 총재로 선출되었고 브뤼메르 쿠데타를 주도해 통령정부의 임시 집정관이 되었다.
  • 1799–1830상원의원(Sénat conservateur)을 지냈고 왕정복고 후 아카데미에서 추방되어 브뤼셀로 갔다가 1830년 7월 혁명 후 귀국했다.
  • 1836파리에서 88세로 사망했으며, 유고에서 ‘사회학(sociologie)’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크 피에르 브리소

Jacques Pierre Brissot

전쟁론을 주도한 지롱드파 언론인·의원

1791~1792년 입법의회에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주도했고, 1792년 4월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1793년 10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언론인이자 입법의회·국민공회 의원으로 노예제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 1791~1792년 혁명을 지키고 확산한다는 명분으로 대외전쟁을 강하게 주장했고 지롱드파의 대표 인물이 됐다. 1793년 6월 지롱드파 몰락 뒤 체포되어 처형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770년대–1780년대법률 서기로 수학한 뒤 《메르퀴르 드 프랑스》와 《쿠리예 드 레롭》에 기고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 1788노예제 폐지 단체인 흑인 친우회를 창설하고 서기로 활동했다.
  • 1789파리 시정부 의원으로 선출되고 《파트리오트 프랑세》를 창간해 1793년까지 편집했다.
  • 1791.10–1792.09센주 선거구에서 입법의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외교위원회에서 대외정책을 좌우했다.
  • 1792.09–1793.10국민공회에서 외르에루아르주 의원을 지냈고 1793년 6월 체포돼 10월 처형됐다.

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 Fayette
푀양파 자유주의·공화주의 프랑스 프랑스 1757–1834 ○ 자연사 · 파리

두 대륙의 혁명에 참전한 프랑스 장군

1789년 7월 11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고, 바스티유 습격 뒤 국민위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1791년 샹드마르스에서 국민위병이 군중에게 발포해 신임을 잃고 중도 노선은 끝났다.

1757년 태어나 1834년 파리에서 죽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다.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 대륙군 소장으로 요크타운 포위전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고, 1789년 삼부회 의원과 국민위병 총사령관을 지내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작성에 관여했다. 혁명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중도 노선을 택했으며, 1791년 샹드마르스 유혈 사건으로 민중의 신임을 잃었고 1792년 체포령 뒤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5년 넘게 수감되었다. 나폴레옹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복고 왕정 아래 자유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830년 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을 다시 지휘하고 루이필리프를 지지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777–1781대륙군 소장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미국군 우익 지휘
  • 1787–1789명사회 의원, 1789년 삼부회 귀족 대표(리에즈몽 선거구)
  • 1789–1791국민위병 총사령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 제출
  • 1791–1792중부군·북부군 사령관, 1792년 8월 체포령 뒤 탈출
  • 1792–1797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 억류되어 올뮈츠 등지에 수감, 1797년 석방
  • 1814–1830부르봉 복고 왕정 아래 국민의회 자유파 의원
  • 1830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 사령관으로 루이필리프 즉위를 지지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

Alexandre de Lameth

혁명 초기의 삼두파에서 푀양파로 이동한 정치가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지만 삼두파와 푀양파에서 입헌군주제로 혁명을 안정시키려 했고, 1792년 왕정이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귀족 장교로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고 특권 폐지를 지지했다. 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루다가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푀양파의 지도자가 됐다. 망명과 귀환 뒤 나폴레옹 정부의 지방관, 왕정복고기의 자유주의 의원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777–1785왕의 친위대에 들어가 근위 기병 장교로 복무했고, 1782년 로샹보 휘하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령으로 참전했다.
  • 1789페론느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제3신분에 합류했고, 8월 4일 밤 특권 폐지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789–1791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뤄 의회 좌파를 이끌었고, 1790년 11월 20일 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 1791–1792자코뱅 클럽 창립 회원이자 푀양파 지도자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고, 1792년 5월 북부군에서 준장이 되었으나 8월 10일 라파예트와 함께 적국으로 넘어가 오스트리아에 억류됐다.
  • 1800–1814귀국해 바스알프·라인모젤·뢰르·포 주의 지방관을 지냈고 1810년 제국 남작이 됐으며, 1814년 중장으로서 솜 주 지방관을 맡았다.
  • 1820–1827왕정복고기에 센마리팀과 센에우아즈에서 자유주의 야당 의원으로 선출되어 빌레르 내각에 맞섰다.

샤를 들레클뤼즈

Charles Delescluze

1830·1848년 혁명을 거쳐 코뮌의 전쟁 대표가 되고 바리케이드에서 죽음을 택한 자코뱅 언론인

1871년 파리 코뮌의 전쟁 대표 들레클뤼즈는 피의 주간 마지막 날인 5월 25일, 무장하지 않은 채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로 걸어가 전투 중 총에 맞아 숨졌다.

드뢰 출신으로 1830년 7월 혁명에 가담했고, 1848년 2월 혁명 뒤 공화파 신문을 내며 활동하다 망명했다. 제2제정기에 체포되어 기아나 유형지 카옌에서 복역했고, 1868년 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1871년 2월 국민의회 의원으로 뽑혔으나 코뮌에 참여하려고 사퇴했다. 자코뱅계 「독립 혁명가」로 공안위원이 되었고 5월 11일 민간인으로서 전쟁 대표를 맡았다. 5월 25일 패배가 분명해지자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 위로 걸어 올라가 총에 맞아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8307월 혁명에 참여했다.
  • 18482월 혁명 뒤 공화파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이후 망명했다.
  • 1868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 1871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사퇴하고 파리 코뮌에 합류해 공안위원과 전쟁 대표를 맡았다.

조르주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와 파리 강화회의 때 프랑스 총리로 헝가리에 가혹한 조건을 밀어붙인 급진파 정치가

방데 출신의 의사이자 언론인으로, 1870년 파리 18구 구청장이 되었고 이듬해 파리 코뮌과 정부 사이의 타협을 시도했다. 독립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1906년 내무장관으로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06~1909년과 1917~1920년 총리를 지냈다. 1917년 11월 전쟁이 가장 어려울 때 총리가 되어 독일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요구했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 냈다. 헝가리를 독일처럼 약화시키려 해 트리아농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낳았다. 1929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0파리 18구 구청장
  • 1906내무장관
  • 1906–1909프랑스 총리
  • 1917–1920프랑스 총리
  • 1919파리 강화회의 의장

폴 레노

Paul Reynaud

패배 앞에서 항전을 주장한 공화국 정치가

1940년 6월, 그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10파리 변호사단 변론대회 제1서기
  • 1919–1924하원의원,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1928–1940하원의원, 파리
  • 1930재무장관
  • 1931–1932식민지 장관
  • 1938법무장관
  • 1938–1940재무장관
  • 1940국무회의 의장, 외무·국방장관 겸임
  • 1946–1962국회의원

에두아르 달라디에

Édouard Daladier

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40국방장관, 1938년부터는 총리 겸임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0–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폴랑 시장
  •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피에르 망데스프랑스

Pierre Mendès France

디엔비엔푸 패전 뒤 넉 달 안의 휴전을 약속하고 총리가 되어 1954년 제네바 협정을 맺은 프랑스 정치가

1954년 총리가 된 피에르 망데스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네바에서 베트민과 직접 협상해 7월 휴전 협정을 맺고, 튀니지 자치 협상도 시작했다.

급진당 소속의 유대계 변호사·경제 전문가로, 전쟁 중 자유 프랑스에 가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찍부터 비판했고, 디엔비엔푸 함락 뒤인 1954년 6월 17일 넉 달 안에 휴전을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고 총리가 되었다. 7월 21일 제네바 협정으로 약속을 지켰다. 여덟 달 재임하는 동안 튀니지 자치를 인정했고, 그해 11월 알제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과 프랑스 핵 개발의 토대를 놓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2급진당 소속으로 유르주 로비에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 1938레옹 블룸 내각에서 재무차관을 지냈다.
  • 1943–1945자유 프랑스에서 재정위원, 이어 국민경제장관을 맡았고, 긴축 정책을 둘러싸고 드골과 대립해 1945년 4월 사임했다.
  • 1954–1955총리로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을 협상하고 튀니지 자치 협상을 열었다. 유럽방위공동체 구상에 반대했으며 1955년 2월 내각 불신임으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