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테러를 고발하다 1920년 장교 부대에 살해된 사회민주당 기관지 『네프서버』의 편집인
교사 출신으로 1903년부터 『네프서버』에 글을 쓰며 교사 조직 운동을 이끌었고, 1906년 헝가리 교사자유연합의 회장이 되었다. 카로이 미하이 연립정부에서 교육 담당 차관을 지냈으나, 평의회 공화국 때는 원칙적 이견 때문에 역할을 맡지 않고 평의회 전국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판했다. 1919년 9월 『네프서버』의 책임 편집인이 되어 백색테러를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1920년 2월 17일 오스텐부르크 부대의 장교들에게 동료 버초 벨러와 함께 끌려가 살해되었고 시신은 도나우강에 버려졌다. 1921년 호르티의 사면으로 가해자들은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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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1898『네프서버』 편집인
- 1906헝가리 교사자유연합 회장
- 1918–1919카로이 정부 교육 담당 차관
- 1919『네프서버』 책임 편집인
- 1920오스텐부르크 부대 장교들에게 살해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엿새 동안 「노동조합 정부」를 이끈 인쇄공 출신 사회민주당 지도자
죄르 주 러버즈드의 정육점 집안에서 태어난 식자공으로, 인쇄노동자 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을 이끌고 1909년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베린케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고, 공산당과의 합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선포에 반대해 당직에서 물러났다. 1919년 8월 1일 평의회 정부가 사퇴하자 총리가 되어 평의회 공화국을 폐지하고 그 법령을 철회했지만, 8월 6일 루마니아군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에게 쫓겨났다. 그 뒤 사회민주당 재건에 참여했고 1922~1931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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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1918인쇄노동자 주간지 『티포그라피아』 편집
- 1909사회민주당 지도부
- 1919베린케이 정부 노동·복지장관
- 1919「노동조합 정부」 총리
- 1922–1931국회의원
평의회 공화국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을 지낸 건설노동자 출신 사회민주주의자
키슈쿤할러스의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 벽돌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들어섰고, 1901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건설노동자 조합과 노동자보험기금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21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지지했고,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으로서 평의회 공화국의 법적 국가원수 겸 총리가 되었으나 실권은 쿤 벨러에게 있었다.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교육장관을 지냈고, 루마니아군에 붙잡혔다가 클루지에서 탈출해 브라티슬라바, 빈,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전후 귀국이 허락되지 않은 채 1947년 파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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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사회민주당 입당
- 1903건설노동자 전국연맹 의장
- 1908노동자보험기금 의장
- 1919혁명통치평의회 의장
- 1919페이들 정부 교육장관
- 1920–1947망명(브라티슬라바·빈·파리)
평의회 공화국의 국방 인민위원이자 붉은군대 총사령관을 지낸 사회민주당 지도자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기계공으로, 금속노동자 조합 서기를 거쳐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1월 베린케이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당 협상에 참여했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국방 인민위원과 붉은군대 총사령관을 지냈고, 7월 빈 주재 공사로 가서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위임으로 협상국 사절단과 평의회 정부의 퇴진을 합의했다. 망명 뒤 빈,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에서 살았고, 1946~1948년 스웨덴 주재 헝가리 공사를 지내다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통합되자 사임했다. 1949년 스톡홀름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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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노동조합 평의회 위원
- 1919베린케이 정부 국방장관
- 1919국방 인민위원, 붉은군대 총사령관
- 1919빈 주재 공사
- 1946–1948스웨덴 주재 헝가리 공사
1921년 베틀렌–페이에르 협정으로 사회민주당의 합법 활동을 얻어 낸 헝가리 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지도자
베스프렘주 바로실뢰드에서 태어난 기계공 출신으로 금속·광산 노동조합을 이끌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광업 부문을 맡았고,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내무장관과 후사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다. 테러로 사회민주당이 선거를 거부하자 1920년 1월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 1921년 귀국해 베틀렌 정부와 협정을 맺었고 1922~1944년 의원, 1927년부터 노동조합 평의회 서기장을 지냈다. 1944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전후 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해 1947년 제명된 뒤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6년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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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광산 노동조합 조직
- 1919내무장관, 노동·복지장관
- 1920–1921오스트리아 망명
- 1921베틀렌–페이에르 협정
- 1922–1944국회의원
- 1944–1945마우트하우젠 수용소
- 1947사회민주당에서 제명, 미국 망명
백색테러를 비판하는 글을 쓰다 1920년 쇼모지 벨러와 함께 살해된 『네프서버』의 사회주의 작가·기자
커셔(코시체)에서 태어나 그곳의 『커셔이 너플로』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1918년 장편소설 『세프치크 집안』을 냈다. 1919년 『네프서버』의 기자가 되어 프롤레타리아, 농민의 토지 갈망, 이주 문제를 다루었고, 헤이여시 이반·프로너이 팔·오시텐부르그모러베크 줄러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백색테러를 비판했다. 이 때문에 1920년 2월 17일 편집인 쇼모지 벨러와 함께 오스텐부르크 부대에 끌려가 총살되었고, 시신은 도나우강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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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장편소설 『세프치크 집안』
- 1919『네프서버』 기자
- 1920오스텐부르크 부대에 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