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을 주도한 초대 대통령, 뒤에 1926년 쿠데타의 지도자
궁을 떠나기 전 그는 "나는 내 손으로 리투아니아를 볼셰비키 국가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으로 1918년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1919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붉은 군대, 베르몬트군, 폴란드군과 싸우는 첫 정부들을 이끌었다. 1926년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웠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미국으로 피해 1944년 화재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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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빌뉴스에서 기자·민족운동 활동
- 1917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
- 1918리투아니아 독립법(2월 16일) 서명
- 1919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
- 1925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 연합 의장
- 192612월 쿠데타 주도, 대통령 복귀 뒤 권위주의 통치
리투아니아 초대 총리, 뒤에 극우 「철의 늑대」의 지도자
1928년 국민회의를 해산하자 그는 "선거를 약속했을 뿐, 언제 열지는 약속하지 않았다"고 농담했다.
1918년 11월 리투아니아 첫 내각의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이후 파리와 국제연맹에서 빌뉴스 문제를 다투었다. 1926년 쿠데타 뒤 다시 총리가 되어 극우 「철의 늑대」를 이끌다 스메토나와 갈라졌고, 1942년 소련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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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철학부 석사 학위 수여
- 1916페름 대학 교수, 국민진보당 입당
- 1918초대 총리 겸 외무장관 취임 (11월), 파리 강화회의 수석대표
- 1918–1920역대 내각에서 외무장관 역임
- 1926제3대 세이마스 의원, 12월 쿠데타 뒤 총리 겸 외무장관 복귀
- 1928독일과 국경 조약 체결, 극우 「철의 늑대」 실질 지도
- 1929스메토나 대통령에게 해임되어 유배
- 1934–1938쿠데타 미수 뒤 투옥, 1938년 프랑스로 추방
1941년 6월 봉기를 준비한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의 창설자이자 베를린 주재 공사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고,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뒤 맨 먼저 리투아니아군에 입대했으며 1919년 1월 1일 빌뉴스 게디미나스 탑에 리투아니아 국기를 올렸다. 1925년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26년 쿠데타에 맞서다 물러났다. 1927~1930년과 1938~1941년 독일 주재 공사를 지냈다. 1940년 소련 점령 뒤 베를린에서 나치와 손잡고 독립을 되찾으려는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을 세웠고, 1941년 임시정부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독일은 그를 가택연금했다. 1944년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각서를 보냈다가 체포되었다. 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회도서관에서 일했다. 반유대적 글 때문에 그를 기리는 이름 짓기는 논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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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빌뉴스 게디미나스 탑에 국기 게양
- 1925–1926리투아니아군 참모총장
- 1938–1941독일 주재 공사
- 1940–1941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 창설, 임시정부 총리 지명
- 1949미국 이주
1949년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을 세워 의장으로서 파르티잔 저항을 이끈 장교
팔랑가에서 태어나 1929년 카우나스 군사학교를 마친 포병 장교로, 1936~1938년 프랑스 퐁텐블로의 포병학교에서 공부했다. 1941년 6월 누이의 가족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독일 점령기에는 나치에 복무하지 않으려 전역했다. 1944년 리투아니아 지역방위군에 들어갔고, 붉은군대가 돌아오자 리투아니아 자유군과 파르티잔에 합류해 지휘관으로 올라섰다. 1949년 2월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을 세워 의장이 되었고 부대를 통합하고 투쟁의 법적 틀을 마련했다. 1951년 12월 뇌출혈로 마비되었고 1953년 5월 30일 체포되어 모스크바에서 베리야의 심문을 받은 뒤 1954년 부티르카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2009년 리투아니아 제4대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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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카우나스 군사학교 졸업, 포병 장교
- 1936–1938프랑스 퐁텐블로 포병학교
- 1944리투아니아 지역방위군, 이어 파르티잔
- 1949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 의장
- 1953체포
- 1954모스크바 부티르카 감옥에서 처형
가명 「바나가스」, 1952년부터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을 이끈 마지막 파르티잔 지휘관
미국 뉴브리튼의 리투아니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리투아니아로 왔다. 1940년 카우나스 군사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일하다, NKVD가 학생들을 감시하라고 압박하자 1945년 초 「바나가스」(매)라는 가명으로 파르티잔에 들어갔다. 다이나바 군관구와 남부 지역의 사령관을 지내며 지하 신문을 펴냈고, 1949년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 의장의 제1대리가 되었다. 1952년 요나스 제마이티스를 이어 연합을 이끌며 무장 투쟁을 멈추고 수동적 저항으로 돌아서라고 명령했다. 1956년 10월 옛 동창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1957년 11월 처형되었다. 1941년 6월 봉기 때 그가 지휘한 부대가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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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카우나스 군사학교 졸업
- 1945파르티잔 합류, 여단장
- 1947다이나바 군관구 사령관
- 1949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 의장 제1대리
- 1952연합 지도자
- 1956–1957체포·처형
1947년 철의 장막을 넘어 서방에 지원을 구하고 돌아와 MGB에 살해된 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지도자
카우나스 근처 유오드부디스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청년 단체 아테이티스와 극우·반유대·반소 단체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LAF)에 들어갔고, 1940~1941년 소련 점령기에 NKVD에 투옥되었다. 1944년부터 카우나스에서 지하 활동을 하다 1946년 무장 저항에 들어가 타우라스 군관구의 비루테 여단을 이끌었다. 1947년 말 철의 장막을 넘어 서방에 파르티잔의 자료를 전했고, 프랑스 정보기관과 CIA의 훈련을 받으며 『자유를 위한 투사들』을 썼다. 1949~1950년 낙하산으로 돌아왔다가 1951년 가을 파바르투피스 근처에서 MGB에 살해되었다. 목격자들은 그가 1941년 카우나스 리에투키스 차고 학살에 가담했다고 증언했으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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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1941NKVD에 투옥
- 1946무장 저항 합류, 비루테 여단장
- 1947철의 장막을 넘어 서방으로
- 1949–1950CIA 낙하산으로 귀환
- 1951MGB에 피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