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3월 31일, 배심원 전원 무죄 평결. 군중은 자술리치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행진했다. 차르 정부는 즉시 재체포를 명령했지만, 혁명가의 총성은 이미 전 유럽에 울려퍼진 뒤였다.
1878년 페테르부르크 시장 트레포프를 저격했고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 한 방은 짜르 전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고 유럽 전역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술리치는 테러가 막다른 길임을 가장 먼저 깨닫고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다. 1883년 플레하노프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고, 「이스크라」 편집위원과 제2인터내셔널 러시아 대표, 그리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다. 멘셰비키로서 1917년 10월 혁명에 반대했고 볼셰비키 정권 아래 폐렴으로 숨졌다.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1930년대 중반, 요양소에서 "당원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답했다. "나는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이자 혁명적 테러 이론가로, 1880년 『테러 투쟁』을 집필하여 소규모 독립 테러 조직에 의한 전제정 타도를 주장했다. 이 구상은 동시대 동료들에게도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훗날 사회혁명당 테러 전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5년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고, 출소 후 항공학 개척자·과학 대중화자로 변모하여 193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동료 유형수들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마호메트의 추종자라고 선언했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하여 '검은 재분할'을 거친 후 1883년 스위스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 해방' 그룹을 창립했다. 조직의 실무자로서 불법 출판물의 간행과 러시아 밀반입을 총괄했으며, 1884년 독일에서 체포되어 러시아에 인도된 후 13년간 카라 강제노동형을 복역했다. 1901년 탈출 후 《이스크라》 편집진에 합류하고 RSDLP 제2차 대회에서 멘셰비키로 서서 당 분열의 한 축을 형성했으며, 말년에는 회고록 《반세기》(За полвека)로 러시아 혁명운동사의 1차 사료를 남겼다.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1909년 《베히》 서문에서, "우리는 총검과 감옥으로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바로 그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고 썼다.
러시아 문화사가이자 수필가로, 1909년 지식인의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한 논쟁적 저작 《베히》(Vekhi)의 발기인이자 편집자였다. 그는 인텔리겐치아가 외적 사회 형태의 재편에 매몰되어 내적 정신의 자각을 외면했다고 보았으며,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총검과 감옥의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는 도발적 문장으로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후에는 전러시아 작가연합 초대 의장과 나르콤프로스 문학부문을 지냈으며, 푸슈킨 연구(《푸슈킨의 지혜》, 1919)와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연구로 중요한 학문적 유산을 남겼다.
소콜로프가 책상에 앉아 쓰고 있었다. 병사들이 둘러싸고 서서 구술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쏟아냈다. … 작업을 마치고 종이 위에 「명령 제1호」라고 썼다. 수하노프, 『혁명의 기록』
궁정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반독재 변호사로 삶을 바꾸었다. 1917년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서기로서 병사분과 회의를 주재해 군대 민주화의 신호탄이 된 「명령 제1호」를 기초했다. 혁명 초기 가장 분주한 비공식 지도자였으나 당파에는 속하지 않았고, 내전 후 소비에트 법률 고문으로 조용히 살다 얄타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85–1896법률·정치경제학 논문 발표, 『미르 보지』 『오브라조바니예』 『지즌』 등에 기고
1894–1898나로드나야 볼랴 사건 연루 조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담 체포(1896); 레벨 유형(1898)
체카의 펠릭스 제르진스키에게 한밤중 심문을 받으면서도 "볼셰비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당당히 맞섰다. 제르진스키는 그를 석방했다 — "보라,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 기독교 실존주의와 개인주의 철학을 정립한 러시아의 대표적 종교·정치 사상가다. 『이정표』(1909) 그룹의 주축으로서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자유 정신문화 아카데미'를 설립해 독립적인 철학 활동을 이어갔다.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소련에서 추방된 후 베를린과 파리에서 『러시아 이념』 『노예와 자유』 등 주요 저작을 집필했으며, 일곱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신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비창조된 자유' 개념은 전체주의 비판과 실존주의적 정치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궁전이 함락되던 순간, 팔친스키는 돌격해 들어온 적위대 앞으로 뛰어들어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의회와 소비에트 대표단이 오는 중이다"라고 외쳤다.
카잔 출신 광산 기술자로, 청년 시절 아나키스트 사상에 공명했으며 1905년 혁명에 가담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1917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 차관과 페트로그라드 총독을 거쳐, 10월 25일 키시킨의 보좌관으로서 겨울궁전 방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궁전 함락 직전 돌입해 온 볼셰비키 병력에게 각료들의 항복 결정을 전했다. 석방 뒤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하며 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 및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을 맡았으나, 1928년 샤흐티 재판의 후속 탄압 속에 체포되어 이듬해 '반혁명 사보타주' 혐의로 총살당했다.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1917년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그는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다.
1890년대 분트에 입당해 1905년 리가 총파업을 지휘하고 1907년 런던 당대회에 분트 대표로 참석한 유대계 사회민주주의자다. 1917년 망명에서 귀국해 멘셰비키 '방위주의자'로 활동했고,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되었다.
소련은 마치 무와 같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다 — 『세대 교체』와 후속 저작에서 반복한 통찰.
페테르부르크 출신 법학자이자 카데트당원. 1913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 내전기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으로 백군에 참여했다. 패배 후 하얼빈 망명길에 올라 『세대 교체』(1921)를 발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메노베호프스트보를 창시했다. 네프 시기 소련을 '겉은 붉고 속은 흰 무'라 평했고, 그의 사상은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1935년 귀국해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로 일했고, 1937년 6월 체포되어 9월 14일 총살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3–1916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1급), 동 대학 사립강사; 카데트당 입당
1917–1918페름대학 정교수, 법학부에서 국가법·법철학 강의
1919–1920콜차크 정부 언론국장; 내전기 백군 이념전선 담당
1920–1935하얼빈 망명, 법학부 교수 겸 КВЖД 고문; 『Окно』 창간, 『세대 교체』(1921)로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창시
「나는 내 정치적 신념을 모른다. 나는 당파적이지 않다. 나는 인민에게 선과 행복을, 러시아 인민이 친절하고 평화로우며 강하고 위대한 인민이 되길 바란다」: 야쿠티야 원정 중 일기에서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의 최연소 장군 중 하나로, 27세에 소장 계급을 받고 '시베리아의 수보로프'로 불렸다. 1918년 12월 페름을 함락시켜 2만 명의 붉은군대 포로를 석방했으며, 콜차크 휘하에서 제1시베리아군을 지휘했다. 내전이 패배로 기운 후에도 하얼빈에서 목수와 마부로 생계를 이어가다 1922년 9월 자원대를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에 나섰으며, 1923년 6월 아얀에서의 항복으로 끝난 이 원정은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군사 작전이었다.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대숙청기인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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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소위 임관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 진급,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수훈
1918.05–08톰스크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제1중앙시베리아군단 지휘
1918.09–12소장 진급(27세), 페름 함락, '시베리아의 수보로프' 별칭
1919중장 진급, 제1시베리아군 사령관
1920–1922하얼빈 망명, 목수·마부로 생계
1922.09–1923.06시베리아 의용대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 아얀에서 항복
1924–1938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1936년 석방, 1938년 대숙청으로 총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