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울리히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Ульрих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89–1951 ○ 뇌졸중

모스크바 쇼 재판의 판사, 스탈린의 '법적 단두대'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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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RSDLP(볼셰비키) 입당
  • 1914리가 공과대학 상업과 졸업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공병대대 소위
  • 1918–1919NKVD·체카 재무과장
  • 1920공화국 혁명군사재판소 판사
  • 1921–1926RSFSR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26–194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35–1948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8–1951군사법률아카데미 고등군사법률과정장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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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5–1944 ✕ 처형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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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코민테른·적군 정보부 요원
  • 1930–1933상하이 정보망
  • 1933–1941도쿄, 독일 대사관의 신임을 얻은 특파원
  • 1941.05–06바르바로사 경고 타전, 묵살
  • 1941.09「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사단 이동의 근거
  • 1941.10체포
  • 1944.11도쿄에서 처형

게오르기 에리호비치 란게마크

Георгий Эрихович Лангема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8–1938 ✕ 처형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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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페트로그라드대학 일본문헌학과 입학, 해군 사관후보생 학교 졸업 후 해군 복무
  • 1919–1922붉은군대 동원, 크론시타트 요새 포대장·사단장 보좌
  • 1923–1928붉은군대 군사기술아카데미 졸업
  • 1928–1933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탄 RS-82·RS-132 개발 주도
  • 1934–1937로켓연구소(RNII/NII-3) 부소장 겸 수석기술자, 군사기술 1급 공병
  • 1937–1938NKVD 체포, 1938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당일 총살
  • 1955사후 복권
  • 1991사회주의노동영웅 추서

헬무트 그뢰트루프

Helmut Gröttrup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독일 독일 1916–1981 ○ 자연사

페네뮌데에서 고로도믈랴까지, R-7의 개념적 선조를 설계한 독일인 로켓 기술자

「낡은 보수적 V-2 형태를 버리면 2천 마일 사거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원추형 형상이 근본적으로 유일한 해법입니다.」 1949년 아내 이르가르트에게

독일의 응용물리학자이자 로켓 유도 시스템 전문가. 페네뮌데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 아래 V-2 유도 제어를 개발했고, 1944년 패전을 논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했다. 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로도믈랴 섬에서 170여 명의 독일 기술자 집단을 이끌며 G-4(원추형 단일 단계)와 G-5(패킷 방식 다단)를 설계했다. 이 개념들은 훗날 코롤료프의 R-7 ICBM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으며, 1949년 소련 평가단은 G-4가 R-3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1953년 서독 귀환 후 로켓을 떠나 스마트 카드를 발명하고 독일어 '인포르마틱' 용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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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V-2 유도 제어 부서, 페네뮌데 육군 연구소
  • 1945–1946뷰로 그뢰트루프 소장, 블라이헤로데 (소련 점령지구)
  • 1946노르트하우젠 연구소 독일 측 책임자, 이후 중앙공장 총책임자
  • 1946–1950NII-88 분소 1호 소장, 고로도믈랴 섬
  • 1954–1958연구원, SEL (슈투트가르트)
  • 1970–1980GAO 전무이사, 기제케 앤 데브리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