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 부대를 이끌어 잔게주르를 지킨 아르메니아 페다이 지휘관
1865년 오스만 제국 샤빈카라히사르에서 태어나 다슈나크의 페다이 부대를 이끌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군의 제1아르메니아 의용대대를 지휘했다.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바투미 조약을 인정하지 않은 그는 1918년 특별타격사단을 이끌고 잔게주르를 장악했다. 역사가 도널드 블록섬은 그가 무슬림 마을을 파괴해 이 지역을 아르메니아인만의 땅으로 바꾸려 했다고 보고, 안트라니그 찰라비안은 그가 잔게주르의 아르메니아인을 지켰다고 본다. 1918년 12월 영국군의 요청으로 카라바흐 진격을 멈추었고, 1919년 부대를 해산했다. 1927년 미국 프레즈노에서 숨졌다.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