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베를린에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에게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를 전달했고, 통역 에리히 좀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게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898년 6월 바쿠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으며, 공식 전기는 그를 그루지야인으로 적는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으로 대외정보부와 방첩부를 함께 맡아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집행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펄레츠키스를 총리로 세우고 7월 14일 인민세이마스 선거를 조직하는 등 한 달여 만에 병합을 완수했다. 전후 외무 차관과 재산총국 부국장 등 한직을 거쳐 1953년 4월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베리야 일당으로 총살되었다.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1–1931캅카스 체카·GPU
1931–19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1938–19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1948년 1월 12일 밤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는 민스크 외곽 차나바의 다차로 유인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고, 사망은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본명 라브렌티 잔즈가바로, 1900년 쿠타이시 현 나후나보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20년 8월 당에 입당했다. 1938년부터 1951년까지 벨로루시 국가보안기관을 이끌며 서부 벨로루시의 대규모 총살과 추방을 조직했고, 이 시기 체포자에 대한 구타에 직접 가담했다는 사건 기록이 남아 있다. 스탈린의 지시로 미호엘스 암살이 결정되자 그의 다차가 작전 거점이 되었고, 1948년 1월 12일 밤 극장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1951년 말 소련 MGB 부장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실각했고, 1953년 4월 체포되어 1955년 10월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1953년 7월 3일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4월 몰다비아 전권대표로서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를 지냈다. 1953년 7월 3일 동독 출장 중 체포되어 그해 12월 23일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됐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재판부는 그를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로 지목해 복권 대상이 아닌 자로 결정했고, 일부 2차 자료가 주장하는 2004년 복권은 확인되지 않는다.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30년대 말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심문 중 구타를 일상화하며 공공연히 말했다: "때리지 않는 자야말로 인민의 적이다!"
그루지야 보안기관에서 성장한 루하제는 1937년 압하지야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간이 수사' 방식의 대규모 체포를 지휘했다. 전쟁기에는 자캅카스 전선 특별부장과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를 거쳐, 1948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베리야 파벌을 겨냥한 조작 사건인 '밍그렐리아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수개월 전인 1952년 11월 스스로 체포되었고, 1955년 역설적으로 베리야 집단 일원으로 재판받아 총살되었다.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