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All-Russian Congress of Soviets
1917년부터 1938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의 최고 국가권력 기관이다. 1918년 헌법 제24조는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의 최고 권력이다"라고 규정했고, 도시 소비에트는 유권자 2만 5천 명당 1명, 주 소비에트 대회는 주민 12만 5천 명당 1명의 대의원을 보냈다. 대회는 200명 이하의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했고 대회 사이의 최고 권력은 이 위원회가 행사했으며, 헌법의 기본 원칙 비준·수정과 평화조약 비준은 대회의 전속 권한이었다. 1936~1938년 헌법 개혁으로 직접 선거에 기초한 최고소비에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상세
기원
소비에트는 1905년 혁명기에 노동자 파업 평의회로 처음 등장했으나 1917년까지 소비에트 대회는 소집되지 않았고 소비에트 자체가 국가권력 기관도 아니었다. 2월 혁명 뒤 1917년 4월 11~16일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전러시아 회의가 열렸고, 회의는 4월 16일 지방 대표 10명과 군대·해군 대표 6명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선출해 제1차 대회 개막까지 전국 소비에트의 중앙 기구로 만들었다.
첫 대회들과 권력 장악
제1차 전러시아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1917년 6월 16일~7월 7일, 페트로그라드)에는 305개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1,090명(표결권 822명)이 참석했고, 임시정부에 협조적인 사회혁명당·멘셰비키가 주도하여 임시정부의 정당성과 6월 공세를 승인했다. 제2차 대회(1917년 10월 25~27일 / 11월 7~9일)는 649명(볼셰비키 390명, 사회혁명당 160명, 멘셰비키 72명)으로 개막했으며 멘셰비키와 우익 사회혁명당 대표단이 퇴장한 가운데 505명의 찬성으로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했다. 평화·토지 법령을 채택하고 전선에서 사형제를 폐지했으며,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구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중앙집행위원회는 제2차 대회를 불법 "사적인 모임"이라 규정하고 그 결정이 지방 소비에트와 군대 위원회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농민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따로 열렸으며(제1차 1917년 5월 4~28일), 노동자·병사·농민 대표가 함께한 것은 1918년 1월 제3차 대회가 처음이었다.
헌정 질서와 쇠퇴
1918년 헌법 제49조는 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에 국가적 의의를 지닌 모든 문제, 곧 헌법의 승인·변경·보충, 대내외 정책의 일반 지도, 영토와 국경, 공화국의 가입과 탈퇴, 전쟁과 평화, 예산과 조세, 인민위원의 임면을 맡겼다. 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는 대부분의 문제에서 권한이 같았으나 헌법 수정과 자치 공화국 헌법 승인은 대회만이 할 수 있었고, 중앙집행위원회는 대회 소집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국가적 의의를 지닌 문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1918년 헌법은 대회를 연 2회 이상 소집하도록 했고 1921년 12월 제9차 대회는 연 1회 소집을 정했다. 상설 회기가 없어 대의원들은 본래의 일자리에서 해제되지 않았기에 대회는 정기적으로만 열렸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대회는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기구였다. 좌익 사회혁명당은 무장 저항 뒤 금지되었고 멘셰비키는 1921년 금지 결정까지 볼셰비키의 큰 야당이었으나, 1924년 무렵 볼셰비키만이 합법 정당으로 남았다. 내전이 진행되면서 소비에트의 권한은 점차 축소되었고 스탈린주의의 대두와 함께 대회는 형식적 승인 기구로 전락했다.
열일곱 번의 대회
1917년부터 1937년 1월까지 모두 열일곱 번의 대회가 열렸다. 제4차(1918년 3월 14~16일)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비준하고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는 결정을 승인했으며, 반대한 좌익 사회혁명당이 인민위원회의에서 탈퇴했다. 제5차(1918년 7월 4~10일)는 1918년 RSFSR 헌법을 채택했고 좌익 사회혁명당 봉기가 일어났으며, 대의원 1,296명으로 가장 규모가 컸다. 제6차(1918년 11월 6~9일)는 교전국에 평화 협상을 제의하고 빈농위원회 폐지를 결정했다. 제7차(1919년 12월 5~9일)는 「평화에 대하여」·「억압받는 민족에 대하여」 결의를 통과시켰고 민족 공화국 대표들이 처음 참여했다. 제8차(1920년 12월 22~29일)는 국가전기화 계획(GOELRO)과 토지법전을 승인하고 파종위원회와 노동국방위원회 규정을 세웠다. 제9차(1921년 12월 23~28일)는 신경제정책(NEP)과 최초의 형법전을 승인했고 1,991명(표결권 1,630명)이 참석했다. 제10차(1922년 12월 23~27일)는 스탈린의 보고에 따라 12월 26일 소련 성립 결의를 채택하고 조약에 서명할 RSFSR 대표단을 선출했으며, 1,727명과 방청객 488명이 참석했다. 제11차(1924년 1월 19~29일)는 소련 헌법을 승인하고 1918년 헌법 개정을 결정했다. 제12차(1925년 5월 7~16일)는 1925년 헌법을 채택했고, 제13차(1927년 4월 10~16일)는 1,603명(표결권 1,088명)이 참석했다. 마지막 제17차 대회(1937년 1월 15~21일, 1,388명)는 1937년 헌법을 승인하고 중앙집행위원회에 선거법 제정과 최고소비에트 선거일 결정을 지시했다.
구분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1922년 소련 성립 뒤 연방 전체를 관장한 소련 소비에트 대회와 다른 기구이며, 벨로루시·우크라이나·자카프카스 등 공화국별 대회도 별개의 기구였다. 또한 1917년에 선출된 최초의 중앙집행위원회(대의원 320명 가운데 멘셰비키 123명, 사회혁명당 119명, 볼셰비키 58명)는 아직 통치 기구가 아니었고 그 의장 치헤이제도 국가원수가 아니었다. 10월 혁명 이후 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가 국가의 최고 권력이 된 것은 제도적 단절이며, 이 점을 평면화해서는 안 된다.
종말의 시점
사료는 종말의 시점을 다르게 적는다. 영문 자료는 1936~1937년 헌법 개혁이 끝날 때 대회가 소멸했다고 보아 1937년 해산으로 적고, 러시아어 자료는 1936~1938년 헌법 개혁의 종료와 1938년 2월 16일 폐지를 든다. 마지막 대회는 1937년 1월의 제17차 대회였고, 1937년 RSFSR 헌법이 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를 직접 선거로 뽑는 최고소비에트로 대체했다는 점은 양쪽이 일치한다. 어느 경우에도 1936년을 종료 연도로 삼을 수 없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Institution overview: evolution from 1917 to 1936 as RSFSR supreme body, composition, jurisdiction, and replacement by Supreme Soviet under 1936 Constitution.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article: chronology of 17 Congresses, constitutional authority under 1918 and 1925 RSFSR constitutions, exclusive power to amend constitution and ratify peace treaties, indirect multi-stage elections.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1918 RSFSR Constitution, Article 24: "The All-Russian Congress of Soviets is the supreme power of the Russian Socialist Federated Soviet Republic." Defines composition (Art. 25), convocation (Art. 26–27), and relationship to VTsIK (Art. 28–30).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