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노동자회
Assembly of Russian Factory and Mill Workers of St. Petersburg
사제 게오르기 가폰이 1903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1904년 2월 15일(28일) 내무대신 플레베의 승인을 받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합법 노동자 조직이며, 러시아 최초의 대중적 합법 노동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주바토프의 경찰후원 조합을 계승해 경찰국과 오흐라나의 후원·자금을 받았고, 1904년 말 11개 지구 분회에 회원 8천~1만여 명을 두었다. 1905년 1월 푸틸로프 공장 해고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청원서를 작성해 겨울궁전 행진을 조직했으며, 진압 직후 금지됐다가 10월 선언 이후 부활해 1906년 2월 최종 폐쇄됐다. 혁명 정당 대표들을 회합에서 배제하고 “법과 질서의 폭력적 파괴 없이” 개량을 추구한 데서 급진파는 이를 정부의 영향 아래 있는 ‘경찰 조합’으로 보았다.
상세
합법 노동자회의 성격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노동자회(정식 명칭 «Собрание русских фабрично-заводских рабочих г.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는 1903년 가을부터 활동을 시작해 1904년 2월 15일(28일) 내무대신 플레베의 승인을 받은 합법 노동자 단체이다. 형식상으로는 노동자의 권리 보호와 도덕·종교적 수준 향상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경찰국·상트페테르부르크 오흐라나·시 당국의 후원과 자금 지원을 받았다. 가폰은 회고록에서 보안부에서 제안받은 400루블을 받아 회계장부에 익명 기부금으로 기입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급진파는 이 단체를 ‘경찰 조합’으로 보았다.
역사
모체는 1901년 5월 모스크바에 세워진 합법 조합 «Общество взаимопомощи рабочих в механическом производстве»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바토프식 «Общество взаимного вспомоществования рабочих в механическом производстве»였다. 1903년 8월 주바토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면서 가폰에게 노동자 조직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가폰은 모스크바 조직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 행정 당국의 후견에서 벗어나려 했다. 가폰은 1903년 봄부터 경찰국과의 인맥을 이용해 단체를 만들려 했고, 1903년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주바토프식 조합을 기반으로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 가폰은 니콜라이 바르나쇼프, 니콜라이 스테파노프, 이반 바실리예프, 표도르 고르바초프, 세르게이 클라도비코프, 세르게이 우스티우자닌 등 노동자들과 함께 헌장을 작성해 내무부에 승인을 청원했다. 이 무렵 A. E. 카렐린의 사회민주주의 서클도 합류했는데, 이들은 지하 음모 활동이 비효율적이라고 보았다. 1904년 2월 15일(28일) 플레베가 승인한 헌장은 회원이 여가를 이성적이고 절제 있게 보내고 러시아 민족적 자기의식에 기초한 계몽을 확산하며 노동·생활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정회원 자격을 러시아 출신 정교도 러시아 노동자로 제한했다.
조직의 머리에는 창립자들로 구성된 책임자 회합이 있었고, 일상 운영은 총회가 선출해 시장의 인준을 받는 이사회가 맡았다. ‘회합 대표자’는 시장의 인준을 받아 회합을 이끌고 감독했으며, 가폰이 첫 3년 임기의 대표자로 선출됐다. 1904년 4월 11일(24일) 비보르크 지구 분회 찻집(오렌부르크스카야 가 23번지)에서 시장 풀롱이 참석한 가운데 첫 모임이 열렸다. 1904년 말까지 11개 지구 분회가 만들어졌고 참가자는 1만 명을 넘었다. 모든 분회는 매일 저녁 7시부터 찻집·도서실·열람실과 수학·음악·외국어·체조 서클을 운영했으며,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강연·집회·음악과 춤의 밤이 열렸고 여성들이 활발히 참여했다. 정치 문제는 공개 의제에서 배제됐지만, 지도부는 휴회 시간에 그런 신중함이 강제적이고 일시적이라고 숨기지 않았다.
1904년 7월 15일(28일) 플레베가 SR의 테러로 살해되고, 8월 26일(9월 8일) 스뱌토폴크미르스키가 내무대신이 되면서 이른바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봄이 시작되어 공적 생활이 활기를 띠었다. 지방 자치회의 청원서가 낭독·토론됐고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청원을 내려 했으나 가폰은 거부했다. 1904년 말에는 회원 다수인 ‘의식이 덜 깬’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가폰과 ‘의식 있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카렐린 형제 중심의 이사회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1904년 12월 ‘본부 야당’은 가폰을 축출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푸틸로프 공장에서 회원 여러 명이 해고되면서 지도부는 내부 갈등을 접고 노동자 권리 투쟁으로 결집했다.
1904년 12월 푸틸로프 노동자들 사이에는 감독 테탸프킨의 건의로 네 명이 예고 없이 해고됐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 이유는 이들이 회합 회원이라는 것이었다. 12월 28일(1905년 1월 10일) 가폰이 이끄는 대표단이 스미르노프 공장장에게 해고자 복직을 요구했으나 단호히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2일(15일) 푸틸로프 분회의 긴급회의는 다음 날부터 작업을 중단하고 감독 해고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기로 결정했으며, 파업은 1월 3일(16일) 오전 8시에 시작됐다. 1월 4일(17일) 파업자들은 8시간 노동일, 3교대, 초과노동 폐지, 비숙련 노동자 임금 인상, 위생 개선, 무상 진료 등을 추가 요구했다. 같은 날 프랑스-러시아 회사 공장(2천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1월 7일(20일) 아침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대형 공장이 파업에 참여했다.
급진화한 회합 노동자들이 차르에게 보낼 청원서 구상을 제기하자 가폰은 망설인 끝에 이를 지지하고 겨울궁전으로 향하는 대규모 행진을 조직하기로 했다. 1905년 1월 5일(18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청원서 문안이 논의됐으나 그들이 낸 대안은 모두 가폰에게 거부됐고, 가폰은 1월 6~7일 밤에 자신의 판본을 작성했다. 문안은 1월 7~8일 논의·승인됐으며, 주요 요구는 보통·비밀·평등 선거에 기초한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 정치범 사면, 시민적 권리와 자유, 간접세를 누진 소득세로 대체, 8시간 노동일 등이었다.
1905년 1월 9일(22일) 행렬은 정규군 부대의 사격을 받고 해산됐다. 정부 공식 자료로는 130명이 죽고 299명이 다쳤으며, 다른 공식 수치는 사망 96명·부상 333명 또는 사망 132명으로 기록됐다. 반정부 측은 사망자 4천 명 이상을 주장했고, 절충적 추산은 사망·부상 합계 약 1천 명 선이었다. 1905년 1월 10일(23일) 회합 활동이 금지되고 은행 예금 3천 루블과 재산이 압류됐다. 회합은 10월 선언 이후인 1905년 11월 활동을 재개했고 가폰이 다시 지도자로 선출됐으며, 비테 정부가 복구 자금 3만여 루블을 내주었다. 정부 내부 세력 간의 다툼 끝에 1906년 2월 최종 폐쇄됐고, 가폰은 그해 3월 오제르키에서 살해됐다.
사례
1905년 1월 22일(구력 1월 9일) 일요일, 가폰 신부가 이끄는 행렬은 겨울궁전으로 향했고 제국근위대 병사들이 발포했다. 파업 노동자와 가족들은 새벽 어둠 속에서 산업 외곽의 여섯 지점에 모여 성상과 성가, 「차르 만세」를 들고 나섰으며, 경찰의 방해 없이 겨울궁전을 향한 3천여 명의 군중이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다. 처음에는 여성·아이·노인이 앞세워질 예정이었고, 가폰의 측근 가운데 한 명인 베라 카렐리나가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면서도 사상자가 나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푸틸로프 사건은 직접적 도화선이었다. 1904년 12월 푸틸로프 제철소 노동자 6명이 회합 가입을 이유로 해고됐고, 공장 측은 다른 이유를 댔다. 공장장이 복직을 거부하자 푸틸로프 노동자 거의 전원이 파업에 들어갔고, 연대 파업으로 파업자 수가 382개 공장 15만 명으로 늘었다. 1905년 1월 21일(구력 1월 8일)에는 도시에 전기도 신문도 없었다.
청원 행진 결정은 1905년 1월 19일(구력 1월 6일) 저녁 슐리셀부르크 가도에 있던 ‘가폰 회관’에서 논의 끝에 내려졌다. 가폰이 직접 정중한 어조로 작성한 청원서는 노동 조건 개선, 공정한 임금, 노동일 8시간 단축, 보통선거 도입을 요구했다. 같은 날 나르바 관문 밖 ‘스타리 타슈켄트’ 선술집에서 열린 회원 모임에서는 청원서 문안이 승인되고 겨울궁전 행진 결정이 내려졌으며, 이 자리는 오늘날 1월 9일 기념 어린이공원 자리이다.
가폰과 측근 노동자들의 영향 아래 노동자들은 집회에서 혁명 정당 대표들을 몰아냈고, 가폰의 발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화환이 만들어져 전 내무대신 플레베의 무덤에 놓였다.
구별점
이 행진은 혁명적 행위나 반란은 아니었지만 당국의 허가 없이 이루어졌다.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 같은 정치 단체들은 정치적 요구가 결여됐다는 이유로 행진을 비판했고, 가폰은 추종자들에게 혁명적 목적을 지지하는 전단을 찢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러시아 노동자 다수는 정교와 전제정에 대한 믿음, 정치 생활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차르를 하느님이 세운 민중의 수호자로 여기며 신하의 어조로 청원했고, 청원서는 차르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만일 그렇게 명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간청에 응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여기 당신 궁전 앞 광장에서 죽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났다. 가폰은 제정 당국과 모호한 관계를 유지하며 청원서 사본을 내무대신에게 보내고 행진을 이끌겠다는 뜻을 알렸다.
1904~1905년의 연표는 참조 문헌마다 다르게 잡힌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활동을 1904년~1906년으로 잡아 헌장 승인(1904년 2월)에서 최종 폐쇄(1906년 2월)까지로 보고, 1903년 8월부터 활동이 시작됐다는 서술도 함께 전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백과사전은 1905년 1월 9일 이후 해산·재산 몰수로 서술하며, 같은 문헌에 인용된 다른 백과사전 표제부는 1903년~1905년 1월로 잡는다. 회원 수 역시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백과사전은 1904년 말 1만 명 이상으로, 같은 문헌에 인용된 편집부 수치는 8천 명으로 기록해 차이가 난다. 집회 참석자는 그보다 몇 배 많았다.
청원서 문안의 저자 문제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최초 문안은 가폰이 작성했고, 이후 멘셰비키와 자유주의자들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최소강령의 여러 요구를 반영해 편집했으며, 마지막으로 가폰이 충성스러운 상소문의 형식을 부여했다. 전문적 노동조합과 달리 이 회합은 그 목적을 도덕·종교적 향상과 상부상조로 규정하고 「법과 질서의 폭력적 파괴 없이」 고용주·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관계
이 단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흐라나·경찰국·시 당국과 연결돼 있었고, 그 요원들이 후원과 자금을 댔다. 전신이자 모델은 주바토프식 조합이었으며, 주바토프는 1903년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면서 가폰에게 노동자 조직을 버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정치경찰 계보에서 보자면 가폰의 회합은 주바토프의 ‘경찰사회주의’ 실험 계열에 속한다. 합법 노동자 조직 체계를 만든 주바토프는 모스크바 보안부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 국장(1902~1903)을 지낸 뒤 1903년 해임됐다.
A. E. 카렐린의 서클은 지하 음모 활동이 비효율적이라고 보고 노동자들 사이의 공개 활동을 모색하며 1903년 가을 바실리옙스키 섬에서 이 단체에 합류했다. 카렐린은 1903년 9월 가폰을 노동운동의 흥미로운 인물로 평하면서 그가 마음속으로는 혁명가라는 말이 있다고 전했다.
회합의 청원과 행진은 1905년 혁명의 직접적 전사였다. 피의 일요일은 1905년 혁명의 적극적 국면이 시작된 사건으로 여겨지며, 사건은 대중의 분노와 제국의 산업 중심지로 번지는 대규모 파업을 불러일으켰다. 라이오넬 코찬 같은 역사가들은 피의 일요일을 1917년으로 이어지는 핵심 사건으로 다룬다.
가폰은 회합을 이끌었고 1906년 3월 살해됐다. 회합 지도부는 청원을 든 평화적 행진의 발기인이었고, 회원과 지지자 가운데에는 니콜라이 바르나쇼프, A. E. 카렐린, D. V. 쿠진, 베라 카렐리나, I. M. 하리토노프처럼 이후 노동운동에서 두드러진 노동자들이 있었다.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full article on founding, charter, structure, 11 branches, role in January 1905 strike and Bloody Sunday, closing and revival
- britannica.com confirms Assembly of Russian Workingmen as the legal workers' organization that planned the January 1905 strikes and arranged the mass demonstration leading to Bloody Sunday
- hrono.ru Gapon's own memoir История моей жизни, Chapter 9 dedicated to the Assembly
- 위키백과 (러시아어)
- sankt_peterburg.academic.ru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