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gnat · 1789–1796

아시냐

Assignat

프랑스 혁명기에 쓰인 화폐 증서. 1789년 국고가 몰수 교회·왕실 토지인 국유재산(biens nationaux)을 담보로 발행한 채무 증서였으나, 1790년 4월 법화로 재정의되면서 지폐가 되었다. 토지 담보 증서가 곧바로 유통 화폐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 용어의 핵심이며, 발행 남발로 급격히 가치가 떨어져 1796년 만다 테리토리알로 대체되었다.

상세

발행 배경

1780년대 프랑스 왕실 재정은 심각한 위기였다. 부채는 40억~50억 리브르로 추산되었고 왕실 예산의 절반가량이 이자 상환에 들어갔다. 몰수 제안의 주체에 대해서는 자료가 엇갈린다. 프랑스어 서술은 탈레랑이 교회 재산을 보상 없이 몰수하자고 제안했다고 하고, 영문 서술은 미라보의 제안으로 몰수되었다고 적는다. 두 서술이 공통으로 전하는 것은 1789년 11월 2일 제헌의회가 모든 교회 재산을 '국가의 처분에 맡긴다'고 결정했고, 그렇게 국유재산이 된 토지가 경매로 처분될 예정이었다는 점이다.

담보와 발행 방식

아시냐는 국유재산, 즉 1789년 10월 7일 접수된 왕실 토지와 1789년 11월 2일 의회가 국가 처분에 맡긴 가톨릭 교회 토지로 담보되었다. 어떤 재산의 가치를 회사 자본을 주식으로 나누듯 아시냐로 나눈다는 발상이었다. 국유재산을 사려는 사람은 반드시 아시냐를 통해야 했고, 매입 대금으로 국가에 돌아온 아시냐는 취소·폐기되어 토지가 분배되는 만큼 발행도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1789년 12월 21일 법령은 1790년 4월에 채무 증서로서 아시냐를 발행하도록 했다. 첫 발행의 이자율에 대해서는 자료가 엇갈린다. 한쪽 영문 서술은 국유재산 경매 대금으로 상환되는 5% 이자라고 하고, 프랑스어 서술과 다른 영문 대목은 1,000리브르권에 하루 20드니에, 즉 연 3%였다고 한다. 뉴욕연은의 독립 서술도 3%설을 전한다. 이자율은 확정된 수치가 아니라 출처를 밝혀 제시해야 한다.

화폐로의 전환

원래 채권으로 기획된 아시냐는 유동성 위기에 대응해 1790년 4월 법화로 재정의되었고(1790년 4월 17일 법화 선언, 이자는 3%로 인하), 1790년 9월 무렵에는 실질적인 유통 지폐가 되었다. 이자 없는 지폐 8억 리브르가 추가 발행되었고, 액면은 50~2,000리브르였다. 프랑스어 서술은 유통 화폐화 시점을 1791년으로 적는다.

논쟁과 반대

아시냐는 발행 당시부터 정치적 논쟁거리였다. 모리, 카잘레스, 베르가스, 뒤발 데프레메닐 등 입헌군주파가 반대했다. 찬성론은 토지가 금·은보다 안정된 가치 원천이라고 주장했고, 반대론은 부당한 재산 탈취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았다. 네케르는 1790년 8월 27일 국민의회에서 이것이 프랑스를 파산시킬 지폐라고 주장하고 9월 3일 사임했다. 탈레랑은 존 로의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고, 콩도르세와 뒤퐁 드 뇌무르는 은이 밀려나고 물가가 오르며 상업이 위축될 것이라고 논박했다.

법화 강제와 테러의 탄압

아시냐를 지탱하기 위해 점점 가혹한 법이 잇따랐다. 1793년 6월 27일 법령으로 파리 증권거래소가 임시 폐쇄되고 환율 공표가 중단되어 투기가 제한되었다. 금·은화를 팔거나 지폐와 귀금속을 달리 취급하거나 아시냐 지불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무거운 벌금과 징역이 부과되었다. 1793년 4월 8일 국민공회는 국가와의 모든 매매·계약을 아시냐로만 표시하도록 했고, 사흘 뒤 민간 부문으로 확대했다. 테러가 시작된 1793년 9월 8일부터는 아시냐 거부가 사형에 처해졌으며 재산은 몰수되고 고발자에게 상금이 주어졌다. 아시냐 제조 책임자 델라마르슈는 1793년 11월 8일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영문 서술은 그를 시몽프랑수아 라마르슈로도 적는다. 1794년 5월에는 계약을 어느 화폐로 체결할지 묻는 것만으로도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통제와 부족

1793년 최고가격법은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에 대응하려 했다. 1794년 2월 24일 '최고가'를 모든 상품으로 확대하자 혼란이 커지고 거래가 마비되고 제조업체가 문을 닫았다. 프랑스어 서술은 가격 통제가 물가를 낮추지 못하고 오히려 부족을 낳았으며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아시냐의 과잉 발행이었다고 지적한다.

집행의 격차와 가치 하락

아시냐는 일상적 교환에 맞지 않는 큰 액면으로 발행되었고, 의회는 아시냐와 구체제 주화의 등가 교환을 끝내 법으로 정하지 않았다. 이미 1790년 가을 의회 스스로 큰 지폐를 소액 주화로 바꾸는 데 7.5% 수수료를 지불했고, 1791년 말 할인율은 흔히 20%를 넘었다. 1791년 9월 아시냐는 18~20% 평가절하되었고, 1792년 2월 1일에는 평가절하 폭이 50%에 접근했다. 1790~1793년 사이 아시냐는 가치의 60%를 잃었다.

발행고와 붕괴

발행고는 시점과 단위를 밝혀 제시해야 한다. 프랑스어 서술은 리브르 단위로 1792년 9월 27억, 1793년 8월 50억, 1794년 초 80억, 1795년 8월 100억, 1796년 1월 약 450억을 제시하며, 애초에 교회 재산 가치인 30억을 넘지 말았어야 했다고 적는다. 영문 서술은 프랑 단위로 1792년 10월 17일 유통액 24억, 1794년 6월 총액 80억에 가까웠고 그중 24억 6,400만만 국고로 돌아와 폐기되었으며, 1795년 5월 말 100억, 7월 말 140억, 1796년 발행액은 위조품을 제외하고 455억 프랑이었다고 한다. 영문 서술의 37억 5천만 프랑은 1790~1792년 평가절하 문맥의 추가 발행 수치로, 이후 유통액과 하나의 누적 계열이 아니다. 아시냐의 가치는 1794년 8월 액면의 31%에서 11월 24%, 1795년 2월 17%, 4월 8%로 떨어졌다. 테르미도르파 국민공회가 '경제적 자유'를 내세워 최고가격제를 폐지한 뒤 1년 만에 아시냐는 거의 모든 가치를 잃었다.

위조

아시냐의 위조는 국내외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연구자들은 프랑스 왕당파가 영국 당국, 그중에서도 고위 장관과 군 지휘관들과 협력해 잉글랜드 전역의 제지 공장에서 위조 아시냐용 종이를 만들고 그것을 인쇄용으로 유통시킨 사실을 기록했다. 프랑스어 서술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영국에서 영국 정부의 묵인 아래 대량의 위조 아시냐가 만들어졌다고 밝힌다. 영국은 당시 프랑스의 주요 적국으로서 프랑스의 경제 위기를 앞당기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다.

만다 테리토리알로의 대체(1796)

총재정부는 1796년 2월 왕실·성직자·교회에서 몰수한 토지로 상환된다고 주장된 지폐이자 토지 증서인 만다 테리토리알을 발행했다. 당시 미상환 아시냐 240억 프랑을 대체하기 위해 8억 프랑이 법화로 발행되었고, 만다는 모두 약 25억 프랑이 발행되었다. 교환 비율은 만다 1에 아시냐 30으로 정해졌으나 실제 가치는 영문·프랑스어 출처에 약 300대 1, 한국어 서술에는 약 400대 1로 제시된다. 만다는 국유재산 매입에 쓸 수 있었지만 심하게 위조되었고 6개월 만에 급속히 평가절하되었다. 1797년 2월 법화 지위를 잃었고 5월에는 거의 무가치해졌다. 프랑스어 서술에 따르면 아시냐의 법화 지위는 1797년 5월 21일(프레리알 2일) 법으로 폐지되었고, 발행 인쇄판과 원판은 1796년 2월 19일(플뤼비오즈 30일)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결과와 사회적 함의

만다의 발행액에 비해 토지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고 곧 고갈되어 화폐는 무가치한 지폐가 되었다. 아시냐를 많이 보유한 사람이 일찍 전환하면 값싼 토지를 얻을 수 있었던 반면, 재력이 없는 시민의 빈곤은 심해졌다. 아시냐는 짧은 기간에 대규모 재산 이전을 일으켜 국유재산 매입자, 즉 새로운 지주 부르주아지를 새 체제에 묶어 두었고, 이들은 이후 왕정 복고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경매된 국유재산은 여전히 비쌌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만 살 수 있었고, 일부는 실제 가치에 비해 거의 공짜로 광대한 토지와 건물을 사들여 부를 축적했다. 한국어 서술은 총재정부가 강제로 채권을 할당해 아시냐를 회수하려 한 정책이 비난을 받았고, 만다의 교환 비율이 국유지를 부유층에 넘기는 결과가 되어 바브후 음모의 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평가

아시냐는 일반적으로 재정적·경제적 실패로 평가된다. 점점 가혹해지는 제재로도 인플레이션에 맞설 수 없었다는 사실은 가격 통제 정책의 해악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인용된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프랑스 국가의 파산을 막고 부채를 줄이는 데 기여했으며, 어려웠던 2년차에 전쟁을 치를 자금을 마련하게 했다.

혼동하기 쉬운 다른 화폐

아시냐는 러시아의 '아시그나치야'(지폐)와 이름이 비슷하다. 아시그나치온니 루블은 1769년부터 1849년 1월 1일까지 러시아에서 쓰였으며 프랑스 혁명과는 관련이 없다. 프랑스보다 앞선 토지 담보 지폐로는 1709년부터 영국령 13개 식민지에서 쓰인 식민지 지폐와 1775년 대륙 달러가 있었고, 이들이 프랑스의 아시냐 계획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1798~1799년 프랑스가 세운 로마 공화국도 아시냐(이탈리아어 '아셰냐티')를 발행했다. 이는 1798년 9월 14일(프뤽티도르 6년 23일) 법으로 발행되었고 교황령의 옛 화폐인 파올로와 줄리오로 표시되었다.

출처

  1. 위키백과 (한국어)
  2. 위키백과 (영문)
  3. fr.wikipedia.org
  4. 위키백과 (영문)
← 용어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