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당 전투 (1870)
Battle of Sedan (1870)
1870년 9월 1~2일 뫼즈강의 요새 도시 스당에서 몰트케의 독일 제3군·뫼즈군이 마크마옹의 프랑스 샬롱군을 포위 섬멸한 전투. 나폴레옹 3세가 병사 104,000명과 함께 포로가 되어 제2제정이 무너지고 9월 4일 파리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상세
8월 18일 그라블로트에서 밀린 바젠의 라인군이 메스에 갇히자, 나폴레옹 3세와 마크마옹은 8월 17일 편성한 샬롱군 13만 명으로 메스를 구하러 나섰다. 군은 프로이센군을 피해 벨기에 국경 쪽으로 북동진했으나 양 측면이 드러났다. 몰트케는 메스 포위군에서 세 개 군단을 떼어 작센 황태자의 뫼즈군을 만들고 제3군과 함께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8월 30일 보몽에서 프랑스군을 덮쳤다. 7,500명과 대포 40문을 잃은 마크마옹은 바젠과의 합류를 포기하고 17세기의 낡은 요새 스당으로 물러나 군대를 쉬게 하고 「적 앞에서 기동」하려 했으나 독일군의 규모를 얕보았고, 두에 장군이 참호를 파자고 청하자 오래 머물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9월 1일 아침 9시 프로이센 제5·제11군단이 북서쪽을 막아 포위가 완성되었다. 새벽 4시 바이에른군이 바제유를 기습하며 전투가 시작되었고, 마크마옹이 부상하자 뒤크로가 지휘를 맡아 후퇴를 명했지만 정부의 임명장을 가진 뱅펜이 이를 뒤집고 역습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사방의 독일 포병이 프랑스군을 가렌 숲으로 몰아넣었고, 뒤크로의 명령으로 마르그리트 장군의 기병대가 플루앙을 향해 세 차례 돌격하다 마르그리트가 치명상을 입고 791명이 쓰러졌다. 오후 2시 30분 프로이센 근위대가 숲을 점령하자 안의 병사들은 항복했다. 나폴레옹 3세는 요새 성벽에 백기를 올렸고, 뱅펜은 「명예로운 항복」을 요구했으나 몰트케는 탄약과 식량 부족, 독일군 25만 명 대 프랑스군 8만 명이라는 수를 들어 거절했다. 9월 2일 11시 30분 뱅펜이 샬롱군과 요새의 항복에 서명했다. 프랑스군은 3,220명이 죽고 14,811명이 다쳤으며 104,000명이 대포 558문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독일군의 손실은 9,860명이었다. 황제는 3일 카셀 근처 빌헬름스회에로 보내졌다. 황제의 생포는 프로이센에 강화를 맺을 상대를 없애 버렸고, 파리에서는 4일 군중이 입법원에 몰려들어 공화국과 국방정부가 섰다. 독일에서는 통일에서 이 전투가 한 역할을 기려 1919년까지 해마다 9월 2일을 「스당의 날」로 지냈으며, 황제가 공식 공휴일로 삼기를 거부해 비공식 기념일로 남았다. 에밀 졸라의 『패주』가 이 전투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