Бои под Свияжском (1918) · 1918.08.07–09.05

스비야시스크 전투

Battle of Sviyazhsk

1918년 8월 카잔이 코무치 인민군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넘어간 뒤, 카잔 서쪽 볼가강 철교 앞의 역 마을 스비야시스크에서 붉은 군대가 무너진 전선을 다시 세우고 버텨 낸 싸움. 군사 인민위원 트로츠키가 열차를 타고 와 이곳에 머물며 무단 후퇴를 총살로 다스리고 공산당원과 소함대, 비행대를 끌어모았으며, 8월 28~29일 블라디미르 카펠의 기습대가 스비야시스크 코앞까지 들어왔다가 물러났다. 이렇게 다시 짜인 제5군은 9월 5일 카잔 공세에 나서 9월 10일 도시를 되찾았다.

상세

트로츠키는 회고록 『나의 생애』에서 8월 7일 모스크바를 떠나 가는 길에 카잔 함락 소식을 들었고, 카잔 앞 가장 가까운 큰 역인 스비야시스크에 열차를 세웠다고 썼다(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도착일을 8월 10일로 적는다). 그는 이곳의 군대가 심비르스크와 카잔에서 물러난 부대들이 저마다 따로 노는 상태였고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후퇴하려는 경향”뿐이었다고 돌아보며, 혁명의 운명이 “한 개 대대, 한 개 중대, 한 정치위원의 굳셈에 달려 있었다. 곧 머리카락 한 올에 매달려 있었다”고 적었다. 그가 열차 인쇄소에서 찍어 모든 부대에 읽힌 명령은 “경고한다. 어느 부대든 멋대로 물러나면 맨 먼저 그 부대의 정치위원을, 다음으로 지휘관을 총살할 것이다. … 겁쟁이와 제 살길만 찾는 자, 배신자는 총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러시아어 위키백과는 8월 11일 명령 제18호로 적는다). 진지를 버리고 기선을 빼앗아 니즈니노브고로드로 가려던 페트로그라드 연대는 무장한 배에 둘러싸여 항복했고, 야전 재판이 연대장과 정치위원, 병사 여럿을 총살형에 처했다. 처형된 수는 41명(러시아어 위키백과), 라리사 레이스네르가 적은 27명, 열 명에 한 명이라는 세르게이 구세프와 백군 측 회고가 서로 엇갈린다. 그사이 당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공산당원 수천 명을 카잔 앞으로 보냈고, 발트해에서 마린스키 수로로 옮겨 온 어뢰정과 대포를 단 기선이 표도르 라스콜니코프의 볼가 소함대를 이루었으며 비행기 십여 대가 카잔을 날마다 폭격했다.

8월 27일 심비르스크에서 옮겨 온 카펠의 부대는 니즈니우슬론에 내려 스비야시스크와 볼가 철교를 빼앗고 붉은 군대의 퇴로를 끊으려 했다. 기습대는 8월 28~29일 밤 튜를레마 역을 차지하고 철도와 전신을 끊은 뒤 스비야시스크로 다가왔으나, 취사병까지 총을 든 트로츠키 열차의 승무원과 라트비아 소총병의 반격에 막혀 카잔 쪽으로 물러났다. 트로츠키는 이 싸움이 8시간가량 이어졌다고 회고했고, 그의 군사 저작집 『혁명은 어떻게 무장했는가』의 편자 주는 8월 29일 스비야시스크의 승리가 카잔 탈환을 “미리 결정지었다”고 적었다. 8월 말 어느 밤 트로츠키와 라스콜니코프가 탄 어뢰정 「프로치니」가 이끈 소함대는 불을 끈 채 우슬론 고지의 포대 앞을 지나 카잔 부두의 백군 함정과 기름 바지선을 불태웠다. 8월 24일 트로츠키는 아진의 제2군 부대가 북동쪽에서 카잔 12베르스타 앞까지 왔다고 알리며 「카잔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명령을 냈다. 그는 이때 붉은 군대 쪽에서 싸운 인원이 “2만 5천에서 3만 명을 넘지 않았다”며 “작은 전쟁은 큰 학교였다”고 적었는데,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9월 5일 카잔 공세에 나선 제5군과 아르스크 집단은 1만 1천 명가량이었다. 미국 역사가 피터 케네즈는 스비야시스크 싸움을 내전의 결정적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5.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