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베를린 피의 메이데이
Blutmai (Berlin, 1929)
1929년 5월 1일부터 3일까지 베를린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 사회민주당 소속 베를린 경찰청장 카를 최르기벨이 옥외 집회를 금지했는데도 독일 공산당이 메이데이 시위를 강행하자, 경찰이 시위대와 주민에게 총격을 가했다. 노동자 거주 지역인 베딩과 노이쾰른을 중심으로 민간인 30여 명이 죽고 200명가량이 다쳤다. 공산당은 이를 사회민주당이 「사회파시즘」으로 변한 증거로 내세웠고, 두 노동자 정당의 분열은 더 깊어졌다.
상세
배경
1928년 12월 13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인 베를린 경찰청장 카를 최르기벨은 붉은 전선투사동맹(RFB)과 나치 돌격대가 얽힌 잇따른 충돌을 이유로 옥외 집회와 시위를 모두 금지했고, 1929년 3월 프로이센 내무장관 알베르트 그르제진스키가 이를 프로이센 전역으로 넓혔다. 코민테른이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이라 규정하던 시기였고, 에른스트 텔만의 독일 공산당은 금지령을 사회민주당이 「파시스트적·독재적 수단」으로 노동자를 억누르려는 시도라고 공격하며 메이데이 시위를 그대로 호소했다. 최르기벨은 금지령을 재확인했다. 메이데이 행진의 전통을 지켜 온 사회민주당이 바로 그 40주년에 시위를 막아선 셈이었다.
사흘간의 충돌
5월 1일 아침 공산당의 동원은 기대에 못 미쳐, 약 8000명이 50~500명 규모의 작은 행렬로 베딩과 노이쾰른에 모였다. 경찰은 곤봉과 처음 쓰인 물대포로 이들을 해산했고, 오후로 가면서 총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충돌은 3일 오후까지 이어졌다. 민간인 사망자는 33명(집계에 따라 32~38명)이었고 거의 모두 경찰 총격에 죽었다. 첫 희생자 25명 가운데 공산당원은 없었다. 1200명가량이 체포되었으나 기소된 사람은 66명뿐이었고, 경찰관 중 총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경찰의 폭력에 대한 공식 조사는 없었고 처벌받은 경찰도 없었다.
결과
프로이센 정부는 5월 3일 붉은 전선투사동맹을 금지했고, 곧 전국으로 금지가 확대되었다. 「피의 메이데이」라는 이름은 「최르기벨의 피의 메이데이」를 규탄한 5월 2일 공산당 파업 호소문에서 나왔다. 한 달 뒤 공산당 제12차 당대회는 이 사태를 정치 발전의 전환점으로 규정하고 직접적 혁명 정세가 다가온다고 결의했다. 텔만은 사태를 「사회민주주의의 사회파시즘으로의 전화」를 보여 주는 결정적 증거로 들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경찰 폭력을 정당화한 것은 공산당에게 그들이 사회파시스트라는 확인으로 받아들여졌고, 노동자 정당들의 분열은 결국 나치에게 이익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1932년 나치에 맞선 투쟁을 위해서라면 최르기벨과도 실천적 협정을 맺겠다고 써서, 이 사건을 통일전선 논쟁의 상징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