Буржуазный национализм · 1930년대–1980년대

부르주아 민족주의

Bourgeois Nationalism

소련에서 비러시아 민족의 언어·역사·문화를 옹호하는 태도에 붙인 정치적 죄목이다. 형법 조문이 아니라 당의 판정 범주였으므로 무엇이 여기 해당하는지는 시기마다 달라졌고, 그 폭이 정책 방향을 재는 눈금이 되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 문화계와 당 간부 숙청에서 본격적으로 쓰였고, 민족 작전의 기소장에도 표준 문구로 등장했으며, 1972년 우크라이나 제1서기 셸레스트 해임처럼 후기에도 되풀이되었다. 짝이 되는 죄목인 대러시아 국수주의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사실상 쓰이지 않게 된 것과 대조된다.

상세

두 개의 죄목, 하나만 남다

1923년 제12차 당대회는 두 가지 편향을 함께 경계 대상으로 규정했다. 지배 민족 쪽의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소수민족 쪽의 지방 민족주의다. 그중 앞의 것이 「주된 위험」으로 지목되었고, 이 판정이 코레니자치야의 근거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이 균형이 무너진다. 대러시아 국수주의라는 말은 공식 담론에서 사라지다시피 하고, 부르주아 민족주의만 남아 계속 확장되었다. 두 죄목의 비대칭은 민족 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었는지를 가장 간명하게 보여 주는 지표다.

무엇이 이 죄목에 해당했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1930년대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화를 추진한 것 자체가 혐의가 되었고, 교육인민위원 스크립니크는 자신이 집행한 정책 때문에 공격받다 1933년 7월 자살했다. 민족 서사시를 긍정적으로 편찬하거나 민족의 과거를 진보로 서술하는 것, 러시아와의 결합을 정복으로 기술하는 것도 시기에 따라 여기 들어갔다.

1948년 이후에는 서방 지향을 뜻하는 뿌리 없는 세계주의과 짝을 이루어 쓰였다. 두 죄목은 방향이 반대인데도 같은 사람에게 함께 씌워질 수 있었다. 자기 민족을 앞세우면 민족주의, 국외를 살피면 세계주의였기 때문이다.

스탈린 이후에도 남았나

남았다. 1972년 5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페트로 셸레스트가 해임되었고, 그의 저서 『우크라이나 우리의 소비에트』(1970)가 민족의 과거를 미화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어 우크라이나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있었다. 대량 처형의 시대는 지났지만 죄목 자체는 해임과 출판 금지, 직장 배제의 근거로 계속 작동했다.

이 범주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무엇을 금지하는지 명확히 규정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필요할 때마다 다시 그을 수 있었고, 각 공화국의 간부에게는 자기 민족의 문화를 어디까지 옹호해도 되는지가 늘 불확실한 상태로 남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постановка вопроса о двух уклонах на XII съезде РКП(б) (1923) и исчезновение обвинения в великорусском шовинизме из официального языка в середине 1930-х.
  2. 위키백과 (러시아어) снятие с поста первого секретаря ЦК КПУ 19 мая 1972 г. и последующая критика книги «Україно наша Радянська» (1970).
  3. 위키백과 (영문) обвинения в буржуазном национализме против украинской литературной генерации 1920-х, самоубийство М. Скрыпника (июль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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