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 고등법원 재판 (1849)
Bourges High Court trial (1849)
1849년 3월 7일부터 4월 3일까지 프랑스 부르주에서 열린 고등법원 재판. 1848년 5월 15일 폴란드 지지 시위 끝에 제헌국민의회에 난입한 사건의 피고들을 심판했다. 블랑키는 징역 10년, 바르베스와 노동자 알베르는 유형, 라스파유는 징역 6년을 받았다. 이로써 2월 혁명의 급진 지도자들이 정치 무대에서 밀려났다.
상세
1848년 4월 선거로 뽑힌 제헌국민의회는 온건 공화파가 다수였고, 사회주의 좌파 의원은 100명 남짓이었다. 정부에서 밀려난 좌파 일부는 거리의 힘에 기대려 했다. 5월 15일 극좌 클럽들이 폴란드를 도우라는 청원을 의회에 내러 가자며 파리 민중을 불러냈고, 시위는 의회 난입으로 번졌다. 경찰 끄나풀이었을지도 모르는 알로이시우스 위베르가 의회 해산을 선언했고, 바르베스는 새 정부 명단으로 보이는 이름들을 외쳤다. 루이 블랑, 노동자 알베르, 블랑키도 휩쓸려 들었다. 라마르틴과 르드뤼롤랭이 부른 국민방위군이 질서를 되찾았고 좌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2월 혁명 뒤 처음 생긴 정치범이었다.
1848년 헌법 제91·92조는 고등법원을 두었다. 대법원 판사 5명과 도 의회 의원 가운데 뽑은 배심원 36명으로 이루어지고, 국민의회가 회부한 국가 전복 사건을 상소 없이 재판했다. 의회는 466 대 288로 피고들을 이 법원에 넘기고, 민중 시위의 압력을 피하려고 파리에서 먼 부르주를 재판 장소로 정했다. 블랑키, 바르베스, 알베르, 소브리에, 라스파유, 루이 블랑 등 17명이 정부 전복과 내전 선동 혐의로, 쿠르테 장군과 코시디에르 등 3명이 공범으로 기소되었고, 루이 블랑과 코시디에르를 포함한 8명은 궐석이었다.
재판은 1849년 3월 7일 자크 쾨르 궁 안의 법원에서 열렸다. 검사장 바로슈가 기소를 맡았고, 공화파 변호사 미셸 드 부르주가 피고들을 변호했다. 블랑키는 법원의 관할권을 다투며 거듭 맞섰고, 검찰 측 증인 266명과 피고 측 증인 62명이 섰다. 라마르틴, 아라고, 비도크도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 4월 2일 판결에서 바르베스와 알베르는 유형, 블랑키는 징역 10년, 소브리에는 7년, 라스파유는 6년을 받았고 궐석 피고 6명도 유형을 선고받았다. 쿠르테 장군 등은 무죄였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바로슈를 두고 “이 바로슈는 검사로서 부르주 고등법원에서 한 번은 5월 15일의 혁명가들을, 또 한 번은 6월 13일의 민주파를, 두 번 다 국민의회 침해죄로 몰아 사납게 날뛰었던 자다”라고 썼다. 3장에서도 1849년 6월 13일 시위 뒤 “산악파의 일부는 외국으로 도망쳤고, 다른 일부는 부르주 고등법원에 넘겨졌으며”라고 적었다. 그러나 6월 13일 사건의 고등법원은 실제로는 1849년 10~11월 베르사유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