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주의
Caesarism
고대 로마의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빗대어, 한 사람의 지도자가 군대와 대중의 지지를 업고 의회와 헌법 위에 서는 권위주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 19세기 중엽 프랑스 제2제정을 두고 유행했고, 마르크스는 1869년 『브뤼메르 18일』 제2판 서문에서 고대와 근대의 계급투쟁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잊은 피상적 비유라고 물리쳤다. 20세기에는 그람시가 계급 세력이 서로 맞서 교착된 위기에서 나오는 해결 방식으로 다시 분석했다.
상세
이 말은 1846년 독일 역사가 요한 프리드리히 뵈머가 처음 썼다. 다만 그때 뜻은 국가가 가톨릭교회를 정치적으로 거느리는 일이었다. 1850년 오귀스트 로미외가 『카이사르들의 시대』에서 이를 군사 지도자의 지배로 규정하면서 말이 곧 유행했고, 1858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리뷰』는 「보나파르트 왕조에 구현된 카이사르주의」를 서툴게 찬양하는 글들을 꼬집었다. 독일에서는 테오도어 몸젠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이 말을 정치 논쟁의 표어로 끌어들였다.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은 권위주의 체제에 적극적인 사회 정책을 묶어 「사회적 카이사르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노동자의 파업을 허용한 1864년 올리비에 법처럼, 적대적인 자유주의 고용주들에 맞서 노동자들을 체제 편으로 끌어오려는 정책이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모든 대중 민주주의가 카이사르주의 쪽으로 간다고 보고, 국민투표식 선거, 의회 경시, 정부 안의 자율적 권력에 대한 불관용을 그 특징으로 들었다.
마르크스는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869년 『브뤼메르 18일』 제2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끝으로 나는 내 글이, 지금 특히 독일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카이사르주의라는 강단의 상투어를 걷어 내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이런 피상적인 역사적 유비에서 사람들은 요점을 잊는다. 고대 로마에서 계급투쟁은 특권적 소수 안에서만, 곧 자유로운 부자와 자유로운 빈민 사이에서만 벌어졌다.」 생산을 떠맡은 노예 대중은 그 싸움의 수동적 받침대였을 뿐이니, 근대의 보나파르트 체제를 카이사르에 빗대는 것은 계급투쟁의 물질적 조건을 무시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같은 현상을 보나파르티즘으로 분석했다.
20세기에 이 말은 다시 쓰였다. 이탈리아 파시즘과 무솔리니는 카이사르주의를 내세웠고,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이를 민주주의 뒤에 오는 근대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카이사르주의의 뿌리를 「권위의 위기」, 곧 사회 집단들이 더는 자기 정당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대표의 위기에서 찾았다. 그는 나폴레옹 1세처럼 진보적 혁명을 이어 가는 카이사르주의와 나폴레옹 3세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막는 카이사르주의를 구별했고, 영국 거국 내각처럼 한 사람의 카이사르 없이 여러 세력의 연합이 하는 「카이사르 없는 카이사르주의」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