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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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 프랑스 제1공화국의 행정부 체제로, 프랑스어로는 디렉투아르(Directoire)라고 한다. 1795년 헌법(공화력 3년 헌법)이 세운 정부 형태로, 권력을 독점하는 단일 수반 없이 5명의 총재가 합의체로 행정권을 집행하는 총재제 정부의 대표 사례다. 1793년 헌법을 대체해 1795년 11월부터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전복될 때까지 존속했고, 이후 통령정부가 들어섰다.
상세
성립
1795년 8월 22일 제정되어 9월 23일 공식 출범한 새 헌법에 대해, 테르미도르파는 선거에서 왕당파가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자 국민공회 의원 2/3 이상을 유임시키는 법안을 함께 통과시켰다. 이에 반발한 왕당파가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폴 바라스의 지시를 받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포병대로 이를 진압했다. 새 헌법 아래 첫 선거는 1795년 10월 20일 실시되었고 10월 26일 국민공회가 해산되었으며, 10월 31일 첫 총재가 선출되었다.
제도
1795년 헌법은 권력분립을 취지로 입법·행정·징세권의 독립을 규정했다. 입법부는 오백인회(하원)와 원로회의(상원, 250명)의 양원제였고 매년 1/3씩 재선되었으며, 원로회의는 오백인회 법안에 대한 거부권만 있고 수정권은 없었다. 행정권은 5명의 총재에게, 징세권은 총재 명령을 받지 않는 6명의 회계관에게 맡겨졌다. 총재는 오백인회가 비밀투표로 후보 명부를 작성하면 원로회의가 그중에서 비밀투표로 선출했고, 40세 이상이어야 했으며 한 명씩 매년 교체되어 집행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보통선거는 폐지되고 일정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에게만 선거권이 인정되어 성인 남성 700만 명 중 유권자는 500만 명이었다. 신교·언론·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었으나 집회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통치와 선거 무효화
총재정부의 주요 목표는 정치·경제적 세력자들의 이익을 옹호·증대하는 것과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막는 것이었다. 1793~94년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총재정부는 나약하고 기반이 부실했다. 집권 초기에는 대량 처형을 중단하고 망명 성직자·왕당파에 대한 조치를 완화했으나, 왕당파의 부상과 왕당파 음모 발각 이후 자코뱅파가 의회를 장악해 교회와 에미그레에 대한 조치를 강화했고 이는 총재정부를 분열시켰다. 제도와 집행의 괴리는 선거 무효화로 드러났다. 1797년 3~4월 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당이 되자 1797년 9월 4일(프뤽티도르 18일)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로 선출 의원 약 200명의 당선을 무효화하고 왕당파 의원·언론인을 카옌으로 추방했으며, 총재 카르노와 바르세레미를 축출하거나 망명시켰다. 1798년 4월 선거 후에는 1798년 5월 11일(플로레알 22일) 당선자 154명 중 정부에 반대하는 106명의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는 법안을 강행 통과시켰고, 1799년 6월 18일(프레리알 30일)에는 의회가 트레야르의 취임을 무효로 하고 두에와 라 루베리에르의 해임을 인정했다. 1799년 새 선거로 진출한 신자코뱅파가 의회 다수파가 되자 루벨이 사퇴하고 시에예스가 총재가 되었으며, 의회는 트레야르의 선출을 무효로 하고 고이에르로 교체한 뒤 라 루베리에르와 메를랭의 사임을 요구해 뒤코스·뮬랑으로 대체했다.
프뤽티도르 쿠데타 이후 자코뱅파가 정부를 장악하면서 정치적 탄압이 다시 강화되어, 1797년 12월 17일 파리 신문 17종이 폐간되었고 귀국하는 에미그레와 성직자에 대한 군사재판·사형이 규정되었으며 카옌·레 섬·올레롱 섬으로의 성직자 유배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 탄압은 로베스피에르 시기의 공포정치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재정과 전쟁
총재정부는 당초부터 재원 부족에 시달렸다. 테르미도르파의 수입자유화·통제가격 철폐로 인플레이션이 폭발하고 국채 아시냐가 폭락한 것이 파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796년 3월 18일 아시냐를 폐지하고 토지전환어음을 발행했지만 그마저 폭락했고, 결국 금·은화로 돌아섰으며 통화 부족으로 심각한 디플레이션과 실업이 발생했다. 대외적으로는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나폴리 왕국·러시아·오스만 제국 등 대프랑스 동맹과 계속 전쟁을 벌여 벨기에와 라인강 좌안을 합병했고, 점령 도시·국가들로부터 막대한 금액과 미술품을 받아 새로 만든 루브르 박물관을 채웠으며, 이탈리아·스위스·네덜란드에 29개의 단명 자매공화국을 세웠다.
총재정부는 이전 공안위원회의 중앙집권적 권력들을 명목상 이어받았으나 계획에 필요한 자금이나 자신들의 의지를 실시할 사법기관을 갖지 못했고 군대에 의존했다. 장군들이 속한 지방을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했고 병사들은 총재정부보다 장군에게 더 충성했으며, 나폴레옹이 재정을 장악한 형태가 되어 총재정부는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노동하는 민중과 바뵈프
경제·사회 문제는 노동하는 민중에게 집중되었다. 아시냐 폭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빵·고기·술·땔감 가격 상승이 파리 노동계급을 특히 괴롭혔고, 후반 2년에는 통화 축소로 경제가 침체되고 실업이 증가했다. 정부는 파리 시민에게 빵을 보조 판매했으나 국고 부족으로 배급량이 1인당 하루 1파운드에서 60g으로 줄었다. 이 같은 식량 부족·물가 폭등·아시냐 가치 폭락으로 커진 도시 민중의 불만을 배경으로, 바뵈프는 '평등파 음모'(Conjuration des Égaux)를 조직해 총재정부 전복과 1793년 헌법 회복, 토지와 생산수단의 집단화를 주장했다. 1796년 3월 29일 비밀 지도부를 결성했고 같은 해 5월 10일 체포되어 1797년 5월 27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총재정부는 이에 대한 감시·진압을 강화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6년 2월 27일 자코뱅파의 주요 집회 장소인 팡테옹 클럽을 폐쇄했고 카르노의 지시로 245건의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며, 1796년 9월 그르넬 진영 사건에서는 약 20명이 사망하고 132명이 체포되었다.
붕괴
포위 전쟁과 재정 파탄, 여러 차례의 패배 속에서 1799년 프랑스군이 네덜란드·스위스에서 승리하며 군사적 지위는 회복되었으나 총재정부는 모든 정치 파벌의 지지를 잃었다. 1799년 10월 이집트에서 귀환한 보나파르트가 시에예스 등과 결탁해 1799년 11월 9~10일 의회 쿠데타(브뤼메르 18일)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폐지하고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통령정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