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운동
Co-operative Movement
노동자와 소비자가 함께 출자해 상점과 공장, 은행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협동조합을 퍼뜨린 운동. 로버트 오언의 사상에서 싹텄고, 1844년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이 내건 원칙이 근대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선언에서 협동조합 공장을 노동의 정치경제학의 승리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한 노력에 머무는 한 독점의 성장을 막지 못하므로 나라 규모로 발전해야 하며 그러려면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상세
기록상 첫 소비협동조합은 1769년 스코틀랜드 펜윅의 직조공들이 오트밀 한 자루를 싸게 팔기 시작한 펜윅 직조공 조합이다. 1830년에는 협동조합이 수백 곳에 이르렀지만 대부분 1840년까지 무너졌다. 협동조합 운동의 아버지로 꼽히는 로버트 오언은 스코틀랜드 뉴래너크의 면방적 공장에 첫 협동조합 상점을 열었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만들며 자치하는 「협동 마을」을 구상했지만 오비스턴과 미국 뉴하모니의 공동체는 실패했다. 윌리엄 킹은 1828년 월간지 『코오퍼레이터』를 내어 작은 상점부터 시작하는 실용적 방법을 퍼뜨렸다.
1844년 12월 21일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은 토드 레인에 버터, 설탕, 밀가루, 오트밀만 갖춘 상점을 열었다. 조합은 이용 실적에 따른 배당을 처음 실시한 조합 가운데 하나였고, 그들이 정한 「로치데일 원칙」은 오늘날 세계 협동조합 원칙의 토대가 되었다. 규약 제1조는 상점에 그치지 않고 조합원 주택 건설, 실업자와 임금이 깎인 조합원을 위한 제조업, 토지 경작, 나아가 생산·분배·교육·통치를 갖춘 자급 정착지를 목표로 내걸었다. 1863년 요크셔와 랭커셔의 협동조합 300곳이 북잉글랜드 협동조합을 세웠고 이는 1872년 협동조합 도매조합이 되었으며, 1900년 영국의 협동조합은 1,439곳에 이르렀다. 독일에서는 슐체델리치(1852, 도시)와 라이파이젠(1864, 농촌)이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창립 선언에서 협동조합 운동, 특히 소수의 대담한 노동자들이 남의 도움 없이 세운 협동조합 공장을 10시간 노동법보다 더 큰 승리라고 불렀다. 그것은 대규모 생산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주인 계급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고, 임금노동은 노예노동이나 농노노동처럼 사라질 일시적 형태임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48년부터 1864년까지의 경험은 협동 노동이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한 노력에 머무는 한 독점의 기하급수적 성장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고, 지배계급이 갑자기 협동조합을 칭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협동 노동은 나라 규모로 발전해야 하고 나라의 수단으로 길러져야 하는데, 토지와 자본의 주인들은 정치적 특권으로 이를 가로막을 것이므로 정치권력의 쟁취가 노동계급의 큰 의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은 공장주가 버리고 떠난 작업장을 노동자 협동조합이 운영하게 하고 이 조합들을 하나의 큰 연합으로 묶으려 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지배계급 가운데 영리한 이들이 협동조합적 생산의 사도가 되었다고 꼬집으면서, 협동조합들의 연합이 공동 계획에 따라 국민적 생산을 조절해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주기적 경련을 끝낸다면 그것이 바로 「가능한」 공산주의라고 썼다. 엥겔스는 1891년 서문에서 결사를 증오한 프루동의 교리와 정반대인 이 포고 때문에 코뮌이 프루동 학파의 무덤이 되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