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민주당
Constitutional Democratic Party
1905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창당한 러시아 제국의 자유주의 정당. 1906년부터 「인민자유당」을 부제로 썼고, 약칭 K-D에서 당원을 카데트라 불렀다. 파벨 밀류코프가 이끌었으며 대학교수·변호사 등 지식인과 전문직이 중심이었다. 제1대 두마의 최대 교섭단체였고 1917년 임시정부의 중심이 되었으나, 10월 혁명 뒤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고 내전에서 백군을 지지하다 지도부 대부분이 망명했다.
상세
입헌민주당은 젬스트보 입헌주의자 동맹과 해방동맹이 합쳐 만든 당으로, 창립 대회는 1905년 10월 12~18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대회 도중 10월 선언 소식이 전해졌으나, 대회는 선언의 표현이 모호하다고 회의적으로 평가하고 제헌의회 소집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다. 강령은 성별·종교·민족과 무관한 법 앞의 평등, 양심·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내걸었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당은 8시간 노동제와 파업권을 지지했고 소수민족의 완전한 시민권과 유대인 해방을 지지했다. 비테 정부 입각 교섭은 결렬되었다. 1906년 1월 제2차 대회는 「인민자유당」이라는 부제를 붙이고 입헌 의회군주정과 여성 참정권을 강령에 넣었다.
1906년 제1대 두마 선거에서 당은 최대 교섭단체가 되었다. 러시아어 출처는 499석 가운데 179석으로, 영어 출처는 의석의 30% 이상으로 적는다. 두마 의장 세르게이 무롬체프도 당 중앙위원이었다. 7월 두마가 해산되자 카데트와 트루도비키·사회민주당 의원들이 비보르크에 모여 밀류코프가 쓴 비보르크 호소문으로 납세 거부와 징병 회피를 촉구했고, 서명자들은 이후 두마 피선거권을 잃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당은 제2대 두마에서 98석, 제3대에서 54석, 제4대에서 59석을 얻었다. 1909년 밀류코프는 당을 「폐하의 반대파」라고 불렀고, 1915년 8월 당은 진보 블록 결성에 참여해 「인민의 신임을 받는 정부」를 요구했다.
2월 혁명 뒤 카데트는 임시정부의 중심이 되었고 밀류코프가 외무장관을 맡았다. 첫 내각에서 당이 차지한 장관직은 영어 출처는 다섯 자리로, 러시아어 출처는 11자리 가운데 넷으로 적는다. 1917년 당대회는 군주정 대신 민주 공화국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연합국에 전쟁 지속을 약속한 밀류코프의 4월 문서가 알려지자 그는 사임했고, 7월에는 카데트 장관들이 우크라이나 자치 문제에 항의해 물러났다. 많은 카데트가 코르닐로프 사건에서 코르닐로프를 지지했다.
10월 혁명 뒤 당은 제헌의회 선거에서 4.7%, 15석을 얻었다(러시아어 출처). 1917년 11월 28일(구력) 인민위원회의는 카데트를 「인민의 적의 당」으로 규정하고 지도자 체포를 명령했고, 체포된 코코시킨과 싱가료프는 1918년 1월 7일 살해되었다. 내전기 카데트는 지하 반볼셰비키 조직과 백군을 지원했고, 데니킨·유데니치·브란겔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19년 5월 옴스크 협의회는 콜차크를 민족 지도자로 선언했다. 백군이 패하자 지도부 대부분이 러시아를 떠났고, 망명지에서 당은 우파와 밀류코프의 공화파로 갈라졌다.